[기자농활] 커리어우먼

  • 입력 2017.03.31 11:38
  • 수정 2017.03.31 13:46
  • 기자명 배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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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배정은 기자]

“삼보승차야. 우린 세 걸음만 걸어도 차를 타.” 토종씨앗을 가지러 가는 길이다. 충남 부여군 홍산면의 생태농장에서 토종씨앗을 파종할 기회를 얻어 내려왔다. 마침 부여에 손이 필요했고, 마침 기자가 농활을 갈 차례였다.

지역기자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신지연 부여여농 조직교육부장이 보여준 저장고는 보물창고 같았다. 70여종이 넘는 토종씨앗들이 무심한 듯 잘 정돈돼 있었다. 부여로 내려가는 버스에서 급하게 공부한 토종씨앗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지 단박에 맞췄다면 좋았으련만. “이게 흰 팥이에요?” 보기 좋게 틀렸다.

하우스로 돌아와 부여 ‘언니들’과 둘러앉아 모판에 상토를 담기 시작했다. 어깨너머 따라하는 건 자신 있어서 모판을 쌓아 씨앗을 놓을 오목한 홈을 만드는 것도 어설프게 따라했는데, 그걸 그대로 사용하니 정말 별 일 아닌데도 서울촌뜨기는 그것마저 기뻤다. 모판에는 오이, 청상추, 대파, 옥수수, 여주, 맷돌호박, 참외, 수세미 등을 심었다. 밭에 가서 심을 홍천노란감자도 잘랐는데, 감자를 자르는 법은 부여의 스타농민 김은심 언니가 손수 일러줬다. 배꼽을 기준으로 싹이 양쪽으로 나눠지게….

감자와 완두콩, 비료를 챙겨 밭으로 이동했다. 삽, 호미, 쇠스랑을 들고 밭 끄트머리의 한 고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말라버린 옥수수대를 뽑아내고 잡초들도 한편에 치웠다. 그 사이 앞 쪽에선 밭을 갈고 비료를 뿌려 감자와 완두콩 심을 준비도 끝났다. 팔이 아프다는 서짐미 회장님을 대신하겠다고 모종삽을 집어 들었는데 삽질이 영 시원찮다. “어머, 얘 나보다 못해.”

그렇게 큰 민폐 없이 토종씨앗을 심는 일이 마무리됐다. 이렇게 돌아가기엔 뭔가 부족하다 싶었는데 멜론을 심으려고 설치 중인 하우스 세 동에 하우스클립을 놓아두는 일로 일과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일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이쁘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감각 있는 사진작가님, 땅과 씨앗 그리고 초록이 있는 배경 덕도 있겠지만 수수한 모습 자체로도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여성농민들의 후광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요즘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커리어우먼이라 하면 정장입고 또각구두를 신고 큰 빌딩으로 출근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커리어우먼은 한 분야에 전문적인 능력을 가진 여성을 총칭한다. 모자가 달린 티셔츠를 입고, 추리닝바지 무릎이 좀 나오고 흙 덮인 운동화를 신고 밭으로 출근하면 어떤가. 누군가의 명령 없이도 우리의 토종씨앗을 연구해 널리 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고, 국민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척척 생산해내는 능력을 가졌는데! 나는 그 날 누구보다 커리어우먼이란 말이 들어맞는 멋진 여성들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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