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놀이 ④ 썰매는 달린다

  • 입력 2017.03.26 14:37
  • 수정 2017.03.26 14:42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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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어떤 놈이야! 빨리 나오지 못 하겠냐!”

종례시간, 선생님이 단단히 뿔났다. 기필코 범인을 색출하고야 말겠다는 기세다. 나는 그 ‘어떤 놈’이 어떤 놈인지 다 안다. 어제 청소시간에 범행현장을 목격했지만, 그냥 방조했다. 윤남이와 재식이와 명철이가 한 짓이다. 그러나 차마 고자질을 할 수는 없다. 선생님이 창가로 가서는 유리창을 이놈저놈 거칠게 여닫으며 혀를 찬다.

“허어, 참, 요놈들…한 군데도 성한 데가 없네.”

교실 창틀에서 유리창 레일을 떼 간 범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창문틀의 레일이 플라스틱으로 돼 나온 것은 좀 나중이고, 1960년대에는 진짜 기찻길처럼 쇠로 된 것이었다. 레일의 중간에 구멍이 있어서 작은 못을 박아 창틀에 고정하였는데, 레일을 잡아 일으켜 굽히면 바로 그 못 박은 대목에서 부러지게 돼 있었다. 고놈 두 토막이면 썰매 밑바닥에 붙이기에 맞춤하였다.

유리창 레일뿐 아니라 교실 뒤쪽에 비치된 양동이의 철사 손잡이도 이미 떨어져 나가고 없다. 그 역시 썰매 밑바닥에 붙이려고 누군가 ‘해간’ 것이다. 강원도 전방 지역의 아이들은 아예 군사용 철조망을 몰래 잘라 썰매 밑에 달기도 했다.

선생님은 결국 그 ‘유리창 레일 탈취사건’을 미제처리하기로 결심한 듯 종례를 마쳤다. 뻔뻔스럽게도 윤남이 일당이 휘파람을 불며 교문을 빠져나간다.

마을에서 가장 가깝고 넓은 순철이네 논바닥은, 벼를 베고 난 다음부터는 아이들의 전천후 놀이터였다. 사내아이들이 ㄹ자 놀이, S자 놀이, 삼팔선 놀이 따위를 하느라 왁자하게 떠들며 부연 먼지를 일으키는 한 쪽에서는 계집아이들이 고무줄을 넘거나 공기놀이를 했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져서 첫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논바닥을 운동장 삼아 하던 아이들의 공동체 놀이는 막을 내린다. 대신에 더욱 가슴 설레는 놀이가 기다리고 있다. 썰매타기다.

어른들의 도움이 없이는 제대로 된 썰매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직접 아들 녀석의 썰매를 만들어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할아버지나 장가 안 간 삼촌 쪽이라면 몰라도.

가장 좋은 기회는 외삼촌이 다니러 왔을 때다. 대개의 외삼촌들은 조카의 어지간한 청은 다 들어주게 돼 있었다. 정치에서는 척신이 발호하면 나랏일을 망친다 했지만, 아이들에게는 역시 외척이 ‘준동’을 해주어야 일이 된다. 잘 사는 집 아이는 자기 집 머슴이 만들어 줬다면서 크고 미끈한 썰매를 끼고 나타나 자랑하기도 했다. 물론 그도 저도 도움받을 사람이 없어서 제 힘으로 뚜덕뚜덕 만든 어설픈 썰매를 갖고 얼음판에 나왔다가, 도중에 철사가 부러지거나 혹은 판자때기가 떨어져 나가 울상을 짓는 아이들도 있었다.

저수지가 없는 마을에서도 얼마든지 썰매를 탔다. 보통 논 한쪽 편 구석에는 물이 나오는 웅덩이가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서 파놓은 관정이 있었다. 날씨가 영하로 내려갈 기미가 보이면 동네 형들이 미리 나가 물을 퍼서 논바닥에 댔다.

다음 날, 논바닥이 거짓말처럼 얼음판이 되었다. 아이들이 저마다 썰매를 들고 나타나 얼음판으로 나아간다. 큰 놈, 작은 놈, 튼튼한 놈, 헐거운 놈…썰매의 모양이야 제각각이지만 지치는 재미는 한 가지다.

썰매장에서 가장 측은한 아이는, 어설픈 것이나마 자기 썰매를 갖고 나오지 못 해서 아이들의 타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녀석이다.

“나도 한 번만 타보자.”

하지만 한창 재미 들려 있는 터에 누군들 썰매를 양보하겠다고 나서겠는가?

“얘, 춘식아! 엄니가 심부름 가라고 너 빨리 오래!”

춘식이가 부모님의 호출을 받았다. 이때다, 싶어 논둑에 쪼그려 앉아서 아이들의 타는 모양을 구경만 하고 있던 종철이가 부리나케 나섰다.

“갔다 와. 내가 대신 타고 있을게.”

춘식이는 죽상을 하며 집으로 향하고, 종철이는 입 꼬리를 귀에 건 채 얼음판으로 진입하신다. 종철이가 탄 썰매가 무서운 속도로 내달린다. 저기 저, 겨울 한복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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