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농사 성공한 농민 안영근

장편소설 같은 삶, 장흥농민 안영근씨

  • 입력 2017.03.26 11:31
  • 수정 2019.05.01 16:02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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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친구들이 학교갈 때 지게 지고 산으로 갔던 안영근씨는 남앞에 나서는 일이 도통 쉽지 않았지만, 하우스 농사를 계기로 사람들과 열심히 어울렸다. 그 덕에 마을 이장으로 선출돼 마을일에 적극 나서고 성우 못지 않은 방송솜씨를 발견하기도 했다. "큰 욕심 없다"는 그는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것도 큰 복으로 여기고 산다.

2015년 농민들의 삶과 그 여정을 담는 인물 인터뷰 ‘이사람’을 기획하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농민들을 추천 받았다. 유명인이나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하게 농사를 지으면 살아가는 농민, 전국 각지에서 묵묵히 땅을 일구는 여러 명의 농민 이름이 추천 명단에 오르내렸다. 그때 가장 먼저 추천이 들어 온 사람이 오늘 만나러 가는 전남 장흥의 안영근씨다.

추천자는 전국농민회총연맹 박형대 정책위원장이었다. 박형대 위원장은 “동네 형님인데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제 소원이 이 형님을 군의원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했다. 어떤 특별함이 있을까. 막연했지만 여러 면에서 출중한 분이겠구나 새삼 기대가 됐다.

9개월만에 안영근씨를 인터뷰하기로 하고 전화를 했다. 대부분 인터뷰를 부담스러워 하지만 소개한 분의 입장도 있고 해서 거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안영근씨는 할 말도 없고, 말도 잘 할 줄 모른다면서 ‘죄송하다’는 말로 인터뷰를 완곡하게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 난감한 일이다. 박형대 위원장에게 다시 인터뷰 성사를 부탁했고, 겨우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왜 안영근씨가 인터뷰를 거절했는지는 몇 마디 이야기를 하면서 짐작할 수 있었다.

장흥읍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안영근씨 집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지은 지 얼마 안돼 보이는 집은 깔끔했다.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트랙터가 세워져 있었다. 안영근씨와 젊은 남자 두 분이 밖에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흥군농민회 장읍지회 총무와 후임 총무를 맡기로 한 분이란다. 농번기를 앞두고 농사일을 의논하고 있던 터였다.

안영근(59)씨는 기자를 만나자 마자 “난 아는 것도 없고 말도 할 줄 모르는데 뭔 인터뷰를 한다고 하냐”면서 여전히 부담스런 모습을 보였다.

사는 이야기 하시면 된다며, 지금까지 농사지으며 살아온 얘기 편하게 해 달라는 말에 “내 사는 이야기는 책으로 써도 몇 권은 나오지….” 비로소 그의 얘기가 시작됐다.

학교공부 대신 인생공부

“원래 고향은 여기서 좀 떨어진 관산이라는 곳입니다. 저는 학교 문턱에 가보지도 못하고 컸습니다.” 사실 좀 놀라웠다. 나이가 아주 많은 분도 아닌데 그 당시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는 것이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생계가 어렵기도 했고, 부모님께서 학교 보내는 것에 신경을 안 썼어요. 그래서 학교 입학을 못했죠. 3학년 나이가 되니까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좀 하셔서 학교를 찾아 갔어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면서 학교에 갔는데, 3학년으로는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입학이라도 하고 학교를 안 다녔으면 편입이 되는데 입학조차 안 했으니 교장선생님도 방법이 없다면서. 친구들은 3학년에 다니는데 1학년으로 시작하는 것도 불편하고.” 결국 학교 입학은 좌절됐다. 팔짝팔짝 기뻐하며 들어갔던 학교를 풀이 죽어 나오게 됐다.

“친구들이 학교 갈 때 저는 지게 지고 산으로 갔죠. 좌절도 많이 하고 때로는 죽고 싶기도 하고. 나는 왜 이렇게 어려운 집에 태어나서 부모한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안영근씨가 인터뷰를 단번에 거절했던 이유가 보이는 듯 했다.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과 더불어 심리적 위축감 등이 앞서지 않았을까.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가난하게 살아온 민초들은 가난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공부였다. 공부만이 유일한 신분상승의 통로라고 여겨왔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유난히 교육열이 높다. 이러한 일반적 정서에도 불구하고 공부조차도 엄두 내지 못할 정도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안영근씨가 꼭 그렇다. 가난이 점철된 유년시절은 대체로 그늘을 드리우기 마련이다.

어려서부터 안영근씨는 일에 묻혀 살았다.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경운기를 끌고 논밭을 갈고 쓸었다. “진짜 나는 산골 촌놈이었어요. 일만 했고, 밖에 일은 전혀 몰랐어요.” 배운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이란 농사밖에 없다고 자신을 정의했다. 그래서 그 당시 꿈은 오로지 농장주가 되는 것이었다. “돼지를 키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돼지 사육에 관한 책도 들여다보면서 공부도 했는데 결국에는 못하고 하우스 농사를 하기로 했어요.” 양돈농장을 대신한 하우스 농사는 안영근씨에게 삶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없으니 어울릴 친구도 없었다. 친구가 있다고 해도 어울리지 못했다. 위축되고 주눅 들어 사람을 만나서 어울리는 것도 피하며 일에만 파묻혀 살아온 유년시절의 모습은 청년이 돼도 계속 됐던 것이다.

“하우스 농사를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하우스 작목반 모임에 나가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야기도 하고, 그전에는 아주 내성적이어서 말도 잘 못했어요.” 이때부터 안영근씨는 세상에 나와 사회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우스 농사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결혼하고 시작한 하우스 농사. 오이농사를 짓기 위해 대나무로 하우스 대를 만들고 산에서 나무를 베다가 기둥을 세워서 하우스를 지었다. 오이모종을 키우기 위해 별도로 만든 작은 하우스를 애지중지 살폈다.

“하우스 한 쪽에 볏짚을 두둑하게 깔고 이부자리를 펴고 집사람하고 같이 하우스에서 자면서 모종을 돌봤어요. 자려고 누우면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져서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자야했는데 어느 날 집사람이 몸이 불편하다고 집에 가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만은 집에서 자는데 어머니께서 밤에 깨우시더라구요. 하우스가 훤하다고. 나와 보니까 하우스에 불이 난거예요. 묘상에 전기열선을 깔았는데 그게 과열이 돼 화재로 번진거죠. 그 때 집사람이 들어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사람이 다칠 뻔 했어요.” 묘상 하우스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다시 파종을 해야 했다. 결국 남들보다 수확이 3개월이나 늦어졌다. 그래도 그해 농사는 예상보다는 잘 됐다고 한다.

“오이를 심고 나서 동네 사람들한테 오이 따서 1,000만원 벌면 돼지 잡아 잔치를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1,200만원정도 벌었고 잔치까지는 아니었지만 오이하는 분들하고 같이 식사를 했어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된 농사는 아니지만 늦게 시작한 농사치고는 성적이 괜찮은 편이었죠.”

부슬부슬 빗방울이 흩날리는데도 배웅을 나온 안영근씨의 손인사는 끝날 줄 모른다.

경운기를 모는 아내

안씨는 하우스 농사 6년 만에 고향을 떠나야 했다.

“동네 분들과 기계화 영농단을 만들었어요. 저는 야맹증이 있어서 같이 하지는 못하고 이름만 빌려 줬는데, 영농단에서 농기계 사는데 보증을 선 게 문제가 됐어요. 독촉장은 계속 날아오고, 의욕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고향을 떠나 안양에서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2년 만에 다시 내려왔어요. 보증문제는 파산으로 정리해 새로 시작하고.”

정부 정책 이행-파산-이농-다시 귀향, 우리나라 농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형적인 농민들의 삶의 궤적이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무엇 하나 물려받은 것도, 배운 것도 없이 땅을 갈며 살아가는 한 농민의 삶은 이렇게 굴곡져 있다. 그는 요샛말로 흙수저인 셈이다.

뭐하나 내세울 것 없고 되는 것도 없는 답답한 삶의 연속 그러나 안영근씨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왔다.

“농사를 잘 해보려고 매일 산에 가서 풀 퇴비를 했어요. 제가 예초기로 풀을 깎아 놓으면 집사람은 전을 쳐서 묶었죠. 풀로 퇴비 만들어 거름으로 쓰면서 농사를 지었어요. 그 때는 젊었으니까 힘든 줄도 모르고. 그리고 집사람은 뭔가 부딪히고 해결하려고 하는 성격이 있어서 항상 큰 힘이 됐어요.”

안영근씨가 살아가면서 가장 큰 버팀목은 아내였다. 야맹증으로 밤에는 일을 할 수 없고 경운기 운전도 할 수 없었다. 그 때 아내가 경운기 운전을 배워서 경운기를 몰았다고 한다.

“우리 집사람이 우리 마을 여자 경운기 운전 1호예요. 집사람이 경운기 운전을 가르쳐 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가르쳐 줬더니 이제는 나보다 더 잘해. 지금은 콤바인으로 나락을 수확하지만 예전에는 벼를 손으로 베고, 탈곡을 하면 저녁에 경운기에 싣고 들어오는데 나는 밤에 운전을 못하니까. 집사람이 경운기 운전을 배워서 경운기에 나락을 실어 날랐지요.”

그 뿐 아니다. 부인은 틈틈이 식당에 나가서 일하며 살림을 도왔다. 지금은 작은 식당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오늘 점심에 50명 예약 손님이 있다고 해서 아침에 도와주고 왔어요.”

아내 못지않게 안영근씨에게 가장 큰 힘은 주위 사람들이다.

“저는 인덕이 많은 사람이에요. 주위 분들이 좋게 봐주고 도와줘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지인들은 안영근씨를 항상 치켜세운다.

“안 감사님 훌륭한 분이예요. 사람들한테 신경 많이 써 주시고 정 많고 좋은 분이죠.” 장평면농민회 사무장의 평이다. 취재 직전 집에서 만난 젊은 분들도 안영근씨 하우스가 철도 부지로 편입돼 철거하게 된 하우스 자재 중에 쓸 만한 거 있으면 가져가라고 해서 보러 왔다고 했다.

군의원보다 높은 이장

3년 전 안씨는 마을 이장이 됐다. “그 당시 이장이 친한 형님이었요. 그 형님이 전국한우협회장이 되면서 동네일을 볼 수 없어서 저한테 도와 달라고 하더라구요. 이장 대행을 1년 했어요.” 그렇게 이장 일을 돕다가 새로 이장을 선출할 때 비로소 정식 이장이 됐다.

“술 먹고 우스갯소리도 초등학교도 못 나왔는데 마을 이장까지 했으니 군의원보다 높은 사람이라 생각한다고 했어요. 하하.”

“애들은 딸이 둘인데 둘 다 대학에 다녀요. 큰 애는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고 싶다고 1년 재수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어요. 입학금하고 첫 학기 학비만 대주고 자기가 알아서 학교 다니고 있어요. 아직 졸업도 하지 않았는데 아르바이트 해서 두 달간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고 있어요. 작은 애는 미술 한다고, 목포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어요.”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안씨의 안색이 밝다. 본인이 못한 공부의 한을 아이들이 풀어줘 뿌듯해 할 수 밖에.

“욕심 안내고 살려고 해요. 지금 하는 대로 꾸준하게 살아야죠. 적은 것에 만족하며 살려고요. 욕심은 끝이 없어요.”

안영근씨는 소위 흙수저로 태어나 굴곡진 일상을 살아왔지만 ‘성공’한 농민이다. 사회적 명성, 어마어마한 부, 내세울 만한 지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그를 빛나게 한다. 가난과 신체적 불편을 딛고 대한민국 대표 성실 농부로 살아왔을 뿐 아니라 오순도순 가족이 있다. 아이들도 제 앞가림 하도록 지켜봐왔고 무엇보다 주변사람들의 신임이 두텁다.

가진 게 적고 배운 것이 없으면 업신여긴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이 그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존경하고 지지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치 있는 인생, 성공한 농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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