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부역하던 날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29

  • 입력 2008.04.14 00:39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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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동네 ‘부역’에 불려나갔다. 우리 동네는 금호강 북천을 건너 마을에 닿기 전에 한 3백 미터 정도 도로 주변에 드문드문 독립가옥들이 들어서 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많다. 그런 집에는 대부분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고 손질을 하지 않아 나무는 제멋대로 자라 차가 다니기에 불편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를 제거하려고 통장이 부역을 부쳤는데 나온 사람은 열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사람 숫자 적은 것에 불만이 없었다.

먼저 우리 앞집 울타리부터 뜯어내기 시작했다. 마침 오늘은 앞집 주인 오씨도 며칠째 머무르고 있던 터라 합류를 했다. 오래 묵은 탱자 울타리 밑동을 기계톱으로 자른 뒤 쇠스랑으로 당겨내는 일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나무들이 악착같이 스크럼을 짜고 버티는 힘이 너무나 완강해서 몇 사람이 붙어 끙끙거려야 했다. 마치 강제연행 하려는 경찰에게 저항하는 시위대의 완강한 스크럼처럼 견고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악착같이 붙어살려는 걸 와 억지로 띠(떼어) 놀라고 하노, 나무가 사람 해꼬지하는 것도 아인데 와 부역은 부쳐가 생땀을 흘리노.”

일은 통 하지 않고 늘 머리 숫자만 채우는 동균이 형님이 탱자나무 아랫도리를 붙잡고 낑낑거리는 모양을 보며 흰소리를 날리자 동영이 형님이 손에 힘을 탁 풀어버린다.

“와, 니 또 할마이 생각나나?” 동균이 형님은 오래 전에 상처를 하고 혼자 산다. 젊은 시절부터 농사일은 건성이었고 모든 농사는 죽은 형수가 다 지었다. 상처 한 후에는 농사를 동네 젊은 사람들에게 줘버리고 그냥 빈둥빈둥 차를 몰고 나다니기만 한다.

동영이 형님이 우리 집 나무 몇 단을 가져가서 논바닥에 불을 피우고 탱자나무를 올려 놓자 따다다다다 소리를 내며 기세 좋게 타오른다. 밑불이 괄게 되자 탱자나무는 금방 재로 변하여 내려앉고 우리는 화마의 기세가 꺾일까봐 부지런히 끌어다가 던져 넣는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불기가 몸을 휘감아 등허리에는 땀이 배어 흐른다. 오늘의 연장자인 부지런한 춘식이 형님은 늦장을 부리다간 자칫 불이 꺼질지도 모른다고 얼굴과 팔목에 가시가 박혀 얼굴을 찡그리는 동주 형님을 채근해서 두 번째 울타리로 빨리 이동하라고 연방 고함을 지르며 진두지휘를 한다.

“부역에 땀 흘리믄 3대를 빌어먹는다카든데 내사 몬 할따. 잘 하거든 아재가 하소.”

동주 형님이 기계톱을 내던지며 길바닥에 드러누워 버린다. 그러자 통장이 재빨리 기계톱을 들고 달려간다. 불길이 거세질수록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쯤해서 시내로 횟감을 사러 갔던 쉰두 살 총각 중환이가 도착했고 두 번째 울타리는 싱겁게 치워져버렸다. 일머리를 모르는 앞집 주인이 빗자루로 길바닥의 가시를 쓸어내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깨끗하게 쓸어놓은 길 위로 선거차량이 시끄럽게 지나간다.

사람만 모이면 언제 어느 때라도 소주는 달고 시원하다. 술판을 벌이자 일하고 있던 장정 세 명이 합류를 한다. 오전 11시의 더운 날에도 저마다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거듭해서 잔을 비운다. 일회용 도시락 세 개에 가득가득 담아온 횟감은 금방 바닥이 났고 늙다리들 세 사람이 불콰해진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자 점심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말들이 길어진다. 모처럼 동네일을 하고 이렇게 오붓하게 남았으니 화남면에 가서 매운탕을 먹자는 얘기와 보신탕을 먹자는 주장과 삼겹살까지 등장했지만 쉰두 살 노총각이 단칼에 정리해버린다. 누구도 이의 달지 않는다.

“늙은 애들은 가마 있으소, 젊은 어른이 다 알아서 하끼요. 불만 있으면 집에 가고.”

‘젊은 어른’ 중환이는 우리 앞집 마당에 솥을 걸고 닭 세 마리 백숙을 하기로 결정한다. 통장은 대추골로 닭 사러 가고 집 주인은 솥에 불을 지피고 ‘젊은 어른’은 소주 사 오는 것을 맡았다. 역할이 없는 사람들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우리 복숭아밭으로 들어가 제법 많이 핀 꽃을 따면서 ‘적화’ 얘기로 시끌벅적하다. 그 바람에 저마다 좋은 방법의 ‘적화’를 주장하는 통에 한 그루를 후딱 해치워버린다. 힘들이지 않고 일을 한 나는 그것이 고마워서 심심한데 장독이라도 깨라고 그들을 충동질한다. 오늘은 마냥 술이나 마시는 날이다. 해거름이면 필경에는 노래방까지 진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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