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이장 - ④ 이장에게도 ‘권력’이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이장 - ④ 이장에게도 ‘권력’이 있었다
  • 이상락 소설가
  • 승인 2017.02.26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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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마을 일을 맡아 하는 이장을 준공무원 신분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지급하는 급여는 없었을까? 내가 이장의 이모저모를 취재를 했던 2001년도에 면사무소를 통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 시기 이장의 급여는 보너스 까지 합해서 월 12만원 수준이라 했다. 요즘 하는 말로 이른바 ‘열정페이’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무려 21세기 들머리의 얘기고….

1950~60년대에는 면에서 알아서 몇 푼씩 챙겨주는 거마비 이외에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을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이장을 마냥 공짜로 부려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동네 사랑방에 마을 원로들이 모였다.

“이제 추수도 끝났으니께 날짜 잡어서 모조 걷을 궁리를 해봐야지유?”

“동짓달 그믐날로 정하드라고. 제가끔 이장 집으로 갖다 주는 것으로….”

마을 주민들이 이장이나 반장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십시일반으로 곡식을 걷어 모아 주는 것을 ‘모조(耗條)’라 하였다. 모조를 받는 날이면 이장이 양조장에 탁주 몇 통을 주문하여 모처럼 주민들에게 술을 한 잔 내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빈한하여 몇 됫박에 불과한 그 모조곡조차 내놓지 못 하는 주민들이 마을마다 몇 집씩은 꼭 있었다.

마을의 궂은일들을 처리하느라 여일 없이 뛰어다니던 그 심부름꾼이, 어느 때부턴가 목소리를 다듬고서 이장으로서의 자존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마을에 앰프가 설치된 것이다. 하시라도 마이크를 잡고 주민들에게 일장연설을 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이 이장에게 주어진 것이다. 스피커가 가설되어서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던 날, 이장은 머리에 포마드까지 바르고 마을회관에 나타났다. 그 날 충청도 당진의 고대리 주민들이 들었던 첫 방송은 이러하였다.

“아, 아, 후, 후우…치지직…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리겄…시방 마이크가 나오는 것이여? 어이, 반장, 잘 들리고 있다고? 알었어. 시방부터 말 하라고? 으음…에 또…요새 여그 저그서 밭두렁에 쥐불을 놓고 있는디, 그라다 산불이 나불면 큰일이어유. 아니, 큰일입니다. 그러니께 주민여러분은 바람 부는 날에 쥐불을…앗다, 실수했네유. 다시…바람이 안 부는 날을 골라서….”

이제는, 행정관서에서 내려온 공지사항을 알리려고 이 골목 저 고샅을 뛰어다닐 필요가 없었다. 뜨끈한 회관 방에서 앰프의 수위치를 올리고 마이크를 잡기만하면, 가만가만 속엣 말처럼 속삭거려도 겁나게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것이었으니 가히 요술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동네 스피커로 음주방송을 하거나, 끝도 없이 횡설수설하는 등, 그 ‘앰프 권력’을 과도하게 과시했다가 다음 해 이장선거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 이장이 여럿이었다.

동네 스피커라면 나도 할 말이 있다. 내 아부지가 이장을 맡았을 때 동각에 따라가서 방송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스위치를 올리고 일단 ‘후우, 후우…’ 불어서 성능을 시험한 다음에, 평소 집안에서 대화하듯 작은 소리로 말을 했는데도, 뒷산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괴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서 침을 꼴깍 삼켰다. 아, 내 손에 마이크만 주어진다면 나도 저기 대고 할 말이 있는데….

기회는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아이고, 내가 깜박 잊고 동네 회관 문을 안 잠그고 와부렀네. 너가 가서 조깐 잠그고 오너라. 옛다, 열쇠.”

나는 이때다 싶어 동각으로 내달렸다. 회관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앰프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런데 이어서 들리는 ‘치지직…’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얼른 꺼버렸다. 그 때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야, 종석아, 너, 작년에 내 콤파스 못 씨게 맹글어분 것, 존 말 할 때 물어내라 잉!’

그런데,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자물쇠로 문을 잠가본 적도 열쇠로 열어본 경험도 없었다. 그래서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놓고 이리저리 돌리다가 대강 얼버무리고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집에 막 도착했을 때, 재남이 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아, 아, 사에이치 회원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겄습니다. 오늘 밤에….”

툇마루에 앉아 있던 아부지가 부릅뜬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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