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 - ③ 이장 선거

  • 입력 2017.02.17 14:32
  • 수정 2017.02.19 19:47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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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장은 준공무원 신분으로서 예나 이제나 대개 그 임기가 2년이다. 자기 집안일은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채,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고단한 직책이었다. 그러나 이장을 한 번이라도 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마을의 유지 반열에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이장 선거가 가까워지면 자천타천의 후보자들이 고개를 들고 나타났다.

“시방까지는 아랫마을에서 이장을 해 왔으니께, 이번 선거에서는 무슨 일이 있드래도 우리 마을에서 이장을 당선 시켜야 돼.”

“그런데, 아랫마을에서는 두 명이 후보자로 나선 반면에 이번에 우리 마을에서는 네 사람이나 나왔다니 이래 가지고 어디 되겄느냐, 이 말이여.”

“이장 하겄다는 사람을 다 불러 모아놓고, 누구를 내보내고 누가 양보할 것인지 담판을 내서 한 사람만 내보내야 한다니께.”

두 개의 자연부락이 모여서 한 개의 리(里)를 이루는 경우, 그 자연부락끼리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윤 씨 가문이 똘똘 뭉쳐서 이장을 한 번 내보자구.”

“그런데 말이여, 우리 윤 씨보다 안 씨들이 여섯 집이나 더 많은디 그것이 쉽겠어? 나머지 성씨들을 우리 편으로 맹글어야제.”

둘 이상의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경우, 이장 선거는 씨족 간의 각축장으로 변하기도 했다.

내가 태어난 섬마을에는 비교적 희성 축에 드는 마(馬) 씨가 전체 주민의 1/3도 넘게 모여 살았고 경주 이(李) 씨가 또 그만큼 분포했기 때문에, 선거 때면 타성바지를 얼마나 내 편으로 끌어들이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었다. 당시의 이장선거는, 일정한 나이에 이른 주민이면 누구에게나 선거권을 주는 ‘보통선거’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가호(家戶) 단위로 한 표만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식구가 여남은이나 되는 집이든 홀아비 혼자 사는 집이든 한 표가 주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동성끼리는 결혼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이 쪽 저 쪽의 씨족이 처가, 외가, 사돈 등으로 어지러이 얽혀 있기 마련이어서 저 쪽 편의 사위나 사돈을 회유하여 우리 쪽으로 끌어오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공작은 거의 성공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견고한 가부장(家父長) 사회였던 그 시절에는 감히 ‘외척이 발호할(?)’ 건덕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피가 물보다 몇 배나 더 진했다. 물론 여성이 이어받은 조상의 피는 그냥 맹물 취급이었다.

“우리 가학리 마을에는 안 씨가 많이 살고 아랫말에는 윤 씨가 많았는디, 선거 때면 서로들 이장을 낼라고 볼만했지유.”

1960년대에 충남 당진군 고대리에서 이장을 지냈던 김기환 노인의 얘기다.

내가 4학년 때였던가, 그해 연말의 이장 선거에서, 경주 이 씨 대표로 나간 내 아부지는 마 씨 대표로 출마한 재환이 아버지한테 두 표 차이로 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뒤에 있었던 국민학교의 급장선거에서 내가 하필이면 재환이에게 졌다. 그, 참, 우리들 세계에서는 급장선거에서 이기고 지는 것 따위, 자치기나 딱지치기 놀이만큼이나 별 것 아니었는데도 괜히 집안 어른들이 흥분을 했다. 반장선거에서 지고 온 날 큰집의 사촌형은 “짜잔한 놈!”, 하면서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 뒤로는 가령 내가 자연과목 시험에서 94점을 받아와도 재환이가 98점이면 칭찬은커녕 여지없이 지청구가 날아왔다. 이장선거가 남긴 막심한 폐해(?)였다.

개인이나 가문의 영광까지는 아닐지라도 그 시절 이장이라는 감투는, 당시의 촌락 공동체에서 사람이면 으레 지니기 마련인 명예욕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수단이었다. 물론 그 시절에 그랬다는 얘기고, 1970년대 이후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어서 농촌의 젊은이들이 ‘물동이 호밋자루’ 내던지고 줄줄이 도시로 빠져나간 뒤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인자는 구장(이장) 그거 지발 해달라고 통사정을 해도 할 사람이 없시유. 그래서 우리 동네는 6년 동안이나 한 사람한테만 맽겨두고 있다니께유. 그 사람이 뭔 죄래유.”

2001년 8월에 만난 충청도 농촌마을의 한 노인이 한숨에 버무려 뱉은 말이다. 그로부터 십 몇 년이 더 지난 지금의 사정은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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