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처분의 트라우마

  • 입력 2017.02.10 17:29
  • 수정 2017.02.10 17:30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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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흰 방역복을 입은 정부 관계자들은 군데군데 서 있었다. 마을 뒷산과 평지가 맞닿는 곳엔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구덩이 위론 대형 비닐이 덧씌워졌다. 볏짚 더미로 둘러싸인 농장에서 살처분된 소를 싣고 온 트럭은 구덩이 인근에 10여 마리의 소를 한꺼번에 쏟아냈다.

트럭이 멈춘 자리마다 축 늘어진 소들이 더미를 이뤘다. 한우 특유의 고운 빛깔 대신 진흙으로 범벅된 소들이 마구잡이로 엉켜있었다. 굴삭기는 소를 한 마리씩 떼 내어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방역당국의 한 직원은 소들이 묻힌 구덩이 위를 오가며 소독액을 연신 뿌려댔다. 정녕 을씨년스러운 살풍경이었다. 소 울음이 끊긴 농가 뒤편에서였다.

또, 구제역이 터졌다. 충북 보은, 전북 정읍에 이어 경기 연천의 농가가 구제역 감염 확진 판정을 받았다. 살처분된 소의 마릿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식같은 소를 묻은 농민들의 시름도 그만큼 깊어지고 있다.

구제역이 확산 일로에 놓이자 아니나 다를까 농가와 정부당국의 책임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소의 낮은 항체형성률을 예로 들며 농가 탓을 하고 있다. 농가의 잘못된 백신접종이 구제역 발병의 이유라는 것이다. 정부의 이런 태도에 농민들은 분통을 쏟아내고 있다.

꼬박꼬박 백신을 놓는 농민들에게 백신접종만 권장할 뿐 평소 백신과 관련한 교육, 사후 관리 등을 소홀히 하다가 발 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정부의 지침대로 따르지 않았다’ 손가락질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구제역 발병 때마다 등장하는 ‘물백신’ 논란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8일 구제역 발병 소에 대한 살처분 작업이 진행되던 산내면의 농가 주위로는 3대의 방역차량이 소독액을 뿌리며 마을 앞 도로를 수시로 오갔다. 소 울음이 끊긴 농장을 벗어나자 방역복 차림의 공무원, 굳게 닫힌 농장문과 소를 구덩이로 밀어 넣는 굴삭기, 곳곳마다 뿌려진 생석회 등의 모습들이 합성된 사진처럼 부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소 잃고도 외양간도 못 고친’ 방역대책이 지속되는 한 매년 겨울마다 ‘트라우마’처럼 위의 모습들을 마주해야 하진 않을는지…. 죽어 엉켜있는 소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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