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 ② - 이장-궁핍한 시대의 호민관

  • 입력 2017.02.10 10:41
  • 수정 2017.02.10 10:42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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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구휼(救恤)’은 왕조시대에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었고, ‘구제(救濟)’ 또한 재난을 당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대책이 아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쟁의 생채기에서 아직 딱지가 떨어지지 않았던 시기라, 절대적 가난에 허덕여야 했던 서민들에게는 나날의 삶이 재난이었고, 국가에서 보자면 그들 모두가 구휼의 대상이었다.

왕조시대에는 임금이 길거리에다 솥을 걸어놓고 죽을 쒀서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했다지만 이 시기의 우리 정부는 죽을 쑬 식량도, 내다 걸 솥단지마저 궁하여 자존심 상하게도 미국에서 건너온 구호물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구호물자를 수령해서 나눠주는 일은 물론 마을 이장의 책임이었다.

면에서 구호물자를 받아온 날은 마을회관 마당이 동네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마당 여기저기에다 반별로 수령한 구호품을 쌓아놓고 개개인에게 배급을 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헌 옷가지 무더기를 다투어 뒤적거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난전이자 도깨비시장을 방불케 했다.

“아이고, 양코배기 옷이라 크기는 크구먼. 바짓가랭이 하나에 몸뚱어리가 다 들어가고도 한 자 가웃은 남겄네, 그랴.”

“와, 이 와이사쓰 조깐 보드라고. 요놈 하나만 갖고도 홑이불로 세 식구가 덮고 자겄는디.”

취학 전이던 어느 겨울, 나도 구호물자 옷가지를 몸에 걸쳤던 기억이 있다. 엄니는 어렵게 골라온 허름한 ‘사지 쓰봉’을 가위로 오리고 바느질을 새로 해서 맞춤한 내 바지 하나를 만들어냈다. 내가 처음으로 흉내내본 ‘제국 인민의 패션’이었다.

옷가지 구호품이야 그렇게 대충 나누면 되었지만 구호양곡의 경우 집집마다 가족 수를 계산해서 제대로 배급을 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그 시절 구호양곡 중에는 밀가루나 우유가루 말고도 보리쌀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도 낟알의 모양이 좀 요상했다. 요즘 시중에서 ‘눌린 보리’ 등의 이름으로 유통되는 바로 그런 모양의 보리쌀이었다. 나도 그때 ‘납작보리’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우스개 잘 하는 상철이 형이 큰소리로 “누가 보(리)쌀을 깔고 엉저부렀는갑다 잉”, 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구호양곡은 봄철 보릿고개 즈음에 배급이 됐기 때문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받아가려고 하는 바람에, 배급 현장에서는 이장·반장과 주민들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일었다.

“우리 집은 다섯 식구구먼유.”

“에이, 아짐씨도 차암…. 여그 장부에 딱 나와 있는디, 그 집 식구가 닛이제 어치케 다섯이유? 큰아들은 저번 달에 군대 갔잖유.”

“군대 간 아들 몫은 안 주남유?”

“앗다, 이라다가는 돌아가신 조부님 몫도 내놓으라 하겄구먼.”

충남 당진군 송악면 고대리에서 이장을 지냈던 김기환 노인은 이장 시절 자신은 한 번도 구호품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고 회고한다. 나눠주다 보면 언제나 모자라기 십상이고, 그럴 경우 별 수 없이 이장이나 반장은 자기 몫을 손해 보거나 아예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그쯤이야 동네 일 맡아하자면 기껍게 감수해야 할 몫이지만, 자기 집 농사를 제대로 돌 볼 겨를을 내지 못 하고 이삼일에 한 번씩 면사무소를 왕래해야 한다는 점도 여간한 손해가 아니었다.

“한 번은 면에 갔다가 수틀린 일이 있어서 계장하고 크게 한 바탕 싸웠시유. 성질이 나서 친구랑 술을 진탕 마시고, 어둑어둑해서야 일어섰지유.”

그 날 밤 고대리 이장 김기환이 어둔 길을 어림하여 걷고 있는데 먼발치에서 등불을 든 두세 명이 앞서가고 있었다. 같이 가자고 불렀는데도 아무 대꾸도 없이 자꾸만 더 빨리 달아나고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 잰 걸음으로 뒤쫓았는데 앞서가던 등불 일행이 돌연 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향했다. 헛것을 보았다 생각하니 식은땀이 났다. 30리 길을 냅다 뛰면서 다시는 이장 안 하리라 다짐했다.

이튿날 면에 가서 알아보니, 그 마을의 한 가난한 집에서 상을 당했는데 장례 치를 여유가 없었기로, 남몰래 시신을 숲속에 매장하려고 그 밤중에 등불을 켜들고 나섰다 했다. 다들, 그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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