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 ① - 출생 신고, 사연도 많았더라

  • 입력 2017.01.27 10:20
  • 수정 2017.01.27 10:4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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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1960년대 초의 어느 봄날,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고대리(안섬 마을)의 김기환 이장이 면사무소로의 출장길에 나선다. 고대리에서 면소재지까지는 13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데다 자전거마저 없던 시절이라, 내를 건너고 고개를 넘고 하자면 만만찮은 행차였으나, 그래도 김기환은 출장가방에 넣을 서류를 챙기면서 콧노래를 부른다. 

“어디 보자, 이것은 호별 비료 신청 대장이고, 요놈은 반별로 소금 나눠줄 명단이고, 아이고, 이번에 새로 출생신고 해야 할 애기들도 여러 명이로구먼. 아, 참 그저께 쥐약 투약한 결과도 보고를 해야 하는디 4반에서는 왜 잡은 마릿수 보고를 안 한 것이여….”

2000년대 초에 내가 고대리를 찾아갔을 때 왕년의 이장 김기환 할아버지는 이미 70대 중반에 이르러 백발이 성성했다. 그는 옛 시절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마을 이장들은 8개 부처 장관의 일을 혼자 다 맡아 했노라며 웃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방행정의 가장 하부단위의 책임자이자 마을 공동체의 심부름꾼이었던 이장은, 마을 안에서 생긴 대소사를 앞장서 해결했을 뿐 아니라 보릿고개에는 정부의 구호물자를 분배하고, 비료나 소금(당시는 소금이 국가 전매품이었다)을 배급하고, 심지어는 주민들의 출생신고까지 대신해 주었다. 내무부, 보건사회부, 농림부, 경제기획원…등 가히 8개 부처 장관의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최 일선의 공무집행자가 바로 마을 이장이었던 것이다. 

이장 김기환이 가방을 챙겨들고 나서려는데 마을 주민 한 사람이 찾아온다.

“이장님 오늘 멘에 가시지유? 우리 애기 출생신고 좀 해 줘야것시유.” 

“아, 자네 아들놈 안즉 신고를 안 했남? 두어 살 됐지 아마?”

“예, 작년 요맘때 낳았으니께 인자는 해야지유. 우리 집에서 부르는 이름은 순돌인디….”

“알겄네. 순돌이, 최순돌….”

그 시절 이장이 수행해야 할 가장 잦은 민원 업무가 바로 면 호적계에 가서 주민들의 출생신고를 대신해 주는 일이었다. 어쨌든 청년 이장 김기환이 양복차림에 ‘네꾸따이’ 갖춰 매고 집을 나선다. “동네일도 좋지만 밀린 농사일은 언제 할 것이냐?”는 아내의 지청구가 거슬리기는 했지만(그 시절 모든 이장 아내들의 공통된 불만이기도 했다. 우리 엄니도 그랬다), 그렇다고 공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동구 밖을 벗어나자 밭에서 일하던 조 씨가 아는 체를 한다. 김기환이 넥타이 매무새를 고치고서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거기서도 출생신고 민원 한 가지가 더 접수된다. 

“우리 딸내미는 작년 유월 달에 났으니께, 집에서는 기냥 유월례라고 불르는구먼.” 

당시엔 문맹자가 워낙 많았던 데다 호적에 올리는 모든 이름은 ‘한자로 된 세 글자여야 한다’는게 통념이었기 때문에, 이렇듯 건성건성 들어온 출생신고 민원을 이장이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평생 호칭이 좌우되기도 했다. 

드디어 다른 업무를 마친 고대리 이장 김기환이 호적계 책상 앞에 앉았다. 

“지난번에 우리 동네 정천식 씨 아들 말여유, 내가 분멩히 정길수라고 적어 냈는디 어째서 호적 이름이 정길주가 돼부렀대유?” 

‘물가 수(洙)’자를 적어냈는데 왼쪽의 삼수변을 빠뜨리고서 ‘붉을 주(朱)’자를 쓰는 바람에 길수가 길주가 된 것이었다. 이런 경우 그 아이만 집안의 돌림자로부터 이탈한 이름을 갖게 된다. 흔한 실수였다. 드디어 김기환 이장이 오늘 부탁받은 출생신고 업무를 시작한다. 출장길에 접수한 조유월례는 ‘조유월(趙六月)’로 올리는 것으로 호적계 직원과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최순돌의 끝 글자인 ‘돌’이 문제다. 궁리 끝에 ‘돌 석(石)’자를 써서 ‘최순석(崔純石)’으로 올리려 했는데 왕년에 서당깨나 다녔다는 면장이 지나가다가 구박을 한다, 

“쯧쯧쯧, 놈의 집 아들을 돌대가리 맹글 것이여? ‘돌’자가 왜 없어? 이렇게 쓰는 것이여.”

면장이 써 보인 글자는 ‘乭’이었다. 순전히 갑돌이 순돌이 따위, 이름자에 들어있는 ‘돌’자를 표기하기 위해 이두 식으로 만든 한자였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성인이 될 때까지 출생신고를 못 하여 호적에서 누락된 경우였다. 뒤늦게 신고를 한다고 했지만, 뒷날 그는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군대 징집영장을 받아들고서 땅을 쳤다. 형제간, 자매간에 각각 다른 이름으로 살다가 취학 통지서를 받고서야 서로 이름을 바꿔 산 것을 발견하고 제 이름을 찾는 경우도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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