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함·곤궁함 모두 이겨낸 그녀의 순박한 삶

젊은 여성농민 부여 김은심씨 “희망 키우며 소박한 행복 만드는 게 우리 가족의 힘”

  • 입력 2017.01.22 15:38
  • 수정 2019.05.01 16:04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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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결혼하고 첫 해 감자 1,500평 농사를 지었어요. 감자를 캐고 후작으로 쪽파농사를 지었죠. 산골 밭이라 돌이 너무 많았어요. 감자를 심으려면 밭을 갈고 돌을 걷어내야 감자를 심을 수 있었구요. 사람을 얻어서 한차례 돌을 주워 내고 감자를 심었고 캐고 나면 또 돌을 주워야 했어요. 너무 힘들었죠. 동네 할머니들이 힘들다고 일하러 오지 않으시려고 했어요. 돌밭에서 못생긴 감자가 나올 줄 알았는데, 동그랗고 예쁜 감자가 나오더라고요. 300평에 170박스 꼴로 감자농사는 잘 된 편이었어요.”

김은심(41)씨의 농사(결혼생활)시작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충남 부여는 남편한테도 객지였다. 학교 선배 따라서 부여에 내려와 남의 땅을 조금 얻어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김씨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부모님이 농사를 지었기에 농사가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논농사만 봐왔기에 밭농사는 새롭고 또 신기하기도 했다.

충남 부여에서 친환경 딸기를 재배하고 있는 김은심씨가 알록달록 탐스럽게 익은 딸기를 수확하며 순박하고 정다운 미소를 짓고 있다. 새해를 맞아 그녀는 “모든 면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농활 오빠 5년 만에 만나 결혼

“결혼하기 전에 와서 보니까 남편이 모종을 키우고 있었어요. 그게 아주 커(대단해) 보이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데. 모종 키우는 걸 그때 처음 봤어요.”

그녀가 남편 이근혁씨를 만난 이야기는 한 편의 동화 같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남편은 우리 동네에 농활 온 대학생 오빠였어요. 친절하고 자상한 서울서 온 대학생 오빠였던 거죠. 농활 끝나고 편지를 보내면 답장도 잘해줬어요. 학교에 찾아가기도 했고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군대를 가면서 연락이 끊겼어요. 그러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우연히 연락이 닿게 되었는데 부여에서 농사를 짓고 있더라고요. 5년 만에 다시 만났어요. 그게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됐죠.”

김씨는 결혼을 하기로 하고 짐을 꾸려 남편 트럭에 싣고 내려왔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언니 집에서 지냈는데, 언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농사를 짓는다고 하는데 땅 한 평 가진 것도 없고 왜소한 체구에 농사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평소 동경한 사람과 같이 살게 된 것에 들떠 있었다. 이런 마음은 1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해 보인다.

“바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어요. 큰애를 낳고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는데 출산을 하고 보니까 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저는 몰랐는데 병원 원장님께서 신생아를 데리고 남편하고 같이 소아과 전문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검사를 했어요. 검사 결과 심장에 문제가 있다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큰애를 출산하면서 큰 시련이 찾아왔다. 수술비를 감당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 이씨는 친구와 선후배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젊은 부부가 농촌에서 고생하며 살아가는 것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수술비가 모여지고, 1차 수술을 무사히 마치게 됐다.

“그때가 겨울이었어요. 수술을 하고 집에 왔는데 보일러가 꺼지지 않고 계속 돌아가는 거예요. 외풍이 심해서 방바닥은 뜨거운데 공기가 너무 차가웠어요. 오죽하면 애기를 침대 밑에 넣기도 하고, 유아용 모기장을 치고 그 위에 이불을 덮기도 했어요. 외풍만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1차 수술을 마치고 결혼식을 올렸다. 첫돌에 2차 수술을 했고, 5살 때 3차 수술을 했다. 수술 결과가 좋아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잘 크고 있고, 지난해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이근혁·김은심 부부가 딸기 하우스에서 활짝 웃었다. 농활 온 대학생과 여학생으로 만난 인연은 부부 사이로 발전했고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겪으며 동고동락한 세월이 어느덧 17년이나 됐다. 한승호 기자

친환경 딸기 농사에 ‘구슬땀’

새살림을 시작하고 1년 만에 마을에서 안쪽 깊숙한 산속 외딴집으로 이사를 했다. 시제를 모셔주고, 벌초 해주며 땅과 집을 얻은 것이다.

“2005년 남편이 WTO 반대 홍콩투쟁에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돈이 어디 있어야죠. 집에 있는 반지 목걸이 모두 팔아서 갈 준비를 했는데 전용철 열사 사망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결국 남편은 홍콩 대신 서울대병원 영안실을 한 달간 지키게 됐죠. 그때 콩 농사를 지어 매상을 해야 했어요. 방에서 상을 펴놓고 콩을 고르는데 애들이 어리니까 자꾸 엄마한테 매달리려고 하잖아요. 애들을 발로 밀어가면서 한 달 동안 콩 10가마를 골라서 매상을 했지요.”

이들 부부는 10년을 산 속에서 감자, 쪽파, 콩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농민회 활동에 부담이 많이 돼 나오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남편은 나이가 많아 정책자금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돼서 제가 막내를 업고 다니며 교육을 받아서 지원을 받게 됐는데 땅을 사려고 하니까 땅이 나오는 게 없었어요. 그러다 농민회 형님들이 소개를 해서 하우스를 사서 하우스 농사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하우스에 딸린 방 한 칸, 거실, 화장실이 있는 컨테이너로 이사를 와서 작년까지 8년간 살았어요.”

하우스 농사를 시작하면서 딸기농사를 하게 되었다. 노지농사 할 때는 어렵게 살았지만 빚을 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우스를 하면서부터 빚을 지게 됐다.

“처음에는 딸기농사 경험이 없어서 모종도 사고, 비닐도 사야하고, 영양제도 많이 들어가고 품삯도 많이 들어 빚을 지게 되더라고요. 하우스 한 동에 500만 원 정도 돈이 들어가는 거 같아요. 4년 동안은 관행으로 농사를 짓다가 이웃에 친환경하시는 분의 권유로 친환경 농사를 하게 됐어요. 친환경 농사를 지으면서 이웃 농민들과 ‘참벗공동체’를 만들어서 한살림에 납품하고, 학교급식에도 내고 최근에는 로컬푸드 매장도 만들어 거기에도 보내고 있어요.”

김씨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담담하게 이야기 할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옆에 같이 있던 부여 여성농민회 분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그녀는 어려서부터 농사를 보고 자라서 농사를 잘 짓는다. 특히 모종을 잘 키운다. 그리고 여성농민회 활동도 가장 열성적으로 한다. 2007년 부여 여성농민회을 다시 만들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농 회의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여농의 중심사업인 토종씨앗사업의 책임을 맡아서 모범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씨는 부여 여농 사무국장 3년, 정책국장 2년을 했다. 그동안 부여군 여성농민육성조례를 만들고 충남도의 행복바우처 사업을 만드는데도 단연 핵심역할을 했다.

“저도 학교 다닐 때 학생운동을 했고, 농촌에 내려오면서 활동을 하려고 했는데 세월이 녹록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 2007년 남편 후배 부부가 들어오고, 전에 여성농민회 활동했던 분이 여농을 같이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 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이뿐 아니라 지금은 참벗공동체의 부대표도 맡고 있다.

“농사 짓고 계신 부모님이 자랑스러워”

부여생활 17년의 가장 큰 성과는 아이들 셋을 훌륭히 키웠다는 것이다.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만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어려서 큰 수술을 세 번씩이나 받으며 자란 큰 딸 조은양은 작년에 한국식품마이스터고에 진학했다. 아빠 엄마를 따라 농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서라고 한다.

큰 딸 조은양이 고교 입학하면서 작성한 자기소개서를 보면 농업에 대한 생각과 엄마 아빠에 대한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저희 부모님은 약 17년 동안 농사를 짓고 계시며 지금은 무농약 딸기와 채소 등을 키우고 계십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 것을 봐 왔고, 소신을 가지고 어렵더라고 친환경 농사를 짓는 부모님이 자랑스러웠고, 자연스럽게 농사와 그와 관련된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적도 많았는데, 예를 들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농사일을 힘들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농산물 가격이 낮아 속상해 하시는 모습을 보면 딸인 저도 옆에서 함께 속상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농사일을 많이 도와드렸는데 제가 점점 크면서 더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부모님처럼 농사짓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고민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농민들이 재배한 농산물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거나 가공을 하면 좀 더 부가가치를 높이고, 농민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런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략)

그리고 저의 어머니는 토종씨앗을 지키는 일을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사라져 가는 토종씨앗을 비록 돈이 많이 되진 않지만 어머니는 씨앗을 지켜야 한다며 여러 가지 토종씨앗을 심고 보존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토종농사를 보며 다른 사람들은 토종씨앗에 대해 잘 모르는데 이것을 알리는 방법 역시 토종씨앗 음식을 개발한다던지, 토종씨앗을 활용한 식품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좀 더 토종씨앗을 접해서 토종씨앗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소망

부모님을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은 많이 있지만, 부모님의 일을 이어받으려는 아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특히 농업이라면 더더욱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보통의 가정보다도 어렵고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고은양은 밝고 당당하게 그리고 농사짓는 부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성장해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제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아직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는 없는데 잡아가는 중인 거 같아요. 하우스 하면서 빚도 늘었지만 지난 5년간 꾸준히 갚아 왔어요. 5년만 지나면 빚도 몽땅 정리할 것 같아요. 농사도 이제는 경험이 쌓여서 잘 지을 수 있고, 처음에는 한살림에만 납품했는데 학교급식에 넣고, 로컬푸드 매장 만들고 하면서 품목도 늘려가고 있어요.”

고단하고 힘겹지만 하루하루 희망을 키워가며 소박한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 김은심씨 부부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제가 소극적이고 겁도 많고, 항상 부족한 것이 많다고 생각해 남편 뒤에 숨고 그랬는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앞으로 나아갈 거예요.”

그녀의 새해 소원은 이미 이뤄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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