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극장 ④ - 변사 - 해설은 내 맘대로

  • 입력 2017.01.15 16:38
  • 수정 2017.02.10 10:43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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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오륙십년 대의 지방극장은 영화만 상영하는 곳이 아니었다. 영화는 보통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상영을 했는데 오전 상영의 경우 손님이 몇 들지 않으면 입장료를 환불하고 영사기를 돌리지 않았다.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 해서 극장을 놀릴 수는 없는 일, 중간 빈 시간에다 유명 가수나 배우들로 구성된 쇼단의 공연을 배치했다. 가수 황금심을 비롯하여 박노식, 이예춘, 황해, 김희갑, 도금봉 등 얼핏 듣기에도 그 면면이 화려한 연예인들이 먼지 자욱한 트럭 짐칸에 몸을 의탁하고 지방극장을 돌며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형편은 여타 서민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곤궁했다.

“어느 날 극장 대기실에서 황금심씨가 단장한테 하는 말을 들었는데, 집에 구공탄 값이 떨어졌으니 출연료를 좀 미리 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거예요. 김희갑씨는 담뱃값이 없어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한 개비씩 얻어 피우고…. 그래도 이름이 좀 있다는 사람들은 여관을 잡아서 숙박을 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극장 무대 한쪽에서 쭈그리고 새우잠을 잤어요.”

당시 군산극장에서 기도주임을 맡았던 박주일씨의 회고다. 군산극장 앞에는 꽤 널찍한 공터가 있었는데 그 공터에서 쇼단의 연예인들과 극장 종업원이 편을 갈라서 양담배 내기 공치기를 하기도 했다. 고무공을 스스로 공중에 띄웠다가 치고 달리는 그 놀이를 ‘찜뽕’이라 했다. 서양식 야구경기를 흉내 낸 것이었다. 박노식, 이예춘, 황해, 김희갑 등의 쟁쟁한 스타들이 지방극장에서 청소하고 오징어·땅콩을 파는 종업원들과 편을 나눠 공치기를 하는 모습은…요즘이라면 감히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지만, 그때는 연예인이라 해서 높은 데서 반짝이는 ‘별’이 아니었다.

1953년에 휴전이 이뤄지고 그 무렵에 영화에 세금을 감면해 주는 면세조치가 취해지는 바람에 우리의 영화계에 활기가 돌았다. 물론 이때에 제작된 영화들은 주인공들의 대사가 녹음된 발성영화, 즉 토키영화였다. 그럼에도 옛적 무성영화를 해설해 주던 변사들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발성영화 시대의 변사들은, 주로 미군부대를 통해 흘러나온 할리우드 영화를 해설하는 일로써 밥벌이를 삼았다. 특히 군산극장 인근에는 미군 비행장이 있었으므로 여타의 지방극장에 비해서 코큰 사람들이 나오는 필름을 더 자주 돌렸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영화의 경우 대사를 번역해서 자막을 붙이는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사가 영화해설을 어림짐작으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군산에도 꽤 이름을 날리던 변사들이 여럿이었다는데, 외화 상영을 앞두고 극장 사장과 변사가 나누는 대화를 잠깐 들어보자.

-영화 시사를 해봤는데 어때요, 줄거리를 대충 짐작할 만 합디까?

“총 쏘고 말 달리는 서부활극이야 뭐, 보안관은 무조건 좋은 놈이고 상대편은 나쁜 놈이니까 해설하기가 쉬운데 앗다, 요놈의 애정영화는 당최 뭔 소린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니까.”

-그래도 선생님이 군산에서는 최고로 유명한 변사 아닙니까?

“내 말은, 오늘 돌릴 애정영화는 그만치 해설하기가 어려우니까, 수고비를 조깐 낫이 주라 이 말이제.”

흥미로운 것은 당시 군산극장에서 미국영화를 해설했던 변사들 대부분이 알파벳도 모르는 ‘영어 깜깜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 날 군산국장에서 (제목이 뭔지는 몰라도) 모처럼 물 건너온 애정영화 필름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변사도 화면을 보면서 발동을 걸었다.

“아, 존슨한테서 장미꽃 한 다발을 받은 메리가, 구르마를 타고 영국의 파리 시내를 달려가는고나! 집에 가서 존슨이 이렇게 말하겠지. ‘어머니, 나도 약혼녀가 생겼어요!’”

변사들에겐, 남자주인공은 무조건 ‘존슨’이고 여주인공은 어느 영화든 무조건 ‘메리’였다. 객석에서 ‘파리는 불란서에 있는디 영국 파리가 뭣이여!’ 하는 고함이 터져 나오는데, 변사도 지지 않고 ‘조용히 하드라고! 나도 조깐 묵고 살어야제!’, 하고서 해설을 계속한다.

“(잔뜩 감정을 넣어서)어머니, 우리의 혼인을 허락해 주세요! 아, 그러나 뺑덕어멈 같은 존슨의 어머니는 아무 대꾸도 안 하고 다마내기만 하염없이 썰고 있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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