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꾸네, 또 오시오.”

주민과 함께 3대째 이어 온 전남 곡성 능파방앗간

  • 입력 2017.01.15 16:11
  • 수정 2017.01.15 16:16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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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물에 불려놓은 각종 재료들이 형형색색의 바구니에 담겨 있는 가운데 마을 주민들이 미리 만들어 말려놓은 가래떡을 썰기 좋게 떼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방앗간 위로 아침해가 솟을 즈음 주문한 떡국떡을 찾은 한 주민이 자전거를 타고 방앗간을 나서고 있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첫새벽의 짙은 어둠을 뚫고 한 줄기의 빛이 오래된 건물 창밖으로 희뿌옇게 새어나온다. 세월의 흔적이 오롯이 느껴지는 ‘모시 송편 판매’가 붙여진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할머니가 전열기의 빨간 불빛 앞에서 추위에 언 몸을 녹이고 있다. 할머니 주위로는 갖가지 떡을 찧기 위한 재료들, 쌀, 콩, 쑥 등이 가공해야 할 날짜들이 적힌 종이쪽지와 함께 마대에 담겨 옹기종기 모여 있다. 며칠 전부터 들어온 주문들이다.

갑작스레 한파가 찾아온 지난 11일 먼동이 터 올 즈음 능파방앗간(전남 곡성군 석곡면) 주인 강칠수(59)·정명자(55) 부부와 정봉덕(86) 할머니가 문을 열고 방앗간으로 들어온다. “아따, 벌써 오시었소.” “잉, 폴짝 왔지.” “밥은 먹었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짧은 인사가 오간다. 뒤따라 시간차를 두고 예닐곱 명의 마을 주민들이 방앗간에 들어서자 적막했던 방앗간에 활기가 돌며 왁자지껄해진다.

방앗간 한 쪽엔 크기도 다양, 색깔도 다양한 바구니에 하루 전날 미리 물에 불려 놓은 여러 잡곡들이 순서를 기다린 채 놓여있다. 떡국떡, 가래떡, 쑥떡, 콩떡 등 다양한 주문이 적힌 주문서도 함께 물에 불린 채 바구니에 붙어 있다.

이윽고 쌀 빻는 기계가 요란스럽게 돌아간다. 투입구에 불린 쌀을 붓고 한 번 빻더니 재차 다시 빻는다. 이를 정사각형 모양의 떡 찌는 찜통에 촘촘히 채워놓고 찌기 시작하자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른다. 찜통이 품어내는 온기에 밤새 차갑게 식은 방앗간의 싸늘한 공기가 밀려나자 전열기 앞에 모여 있던 아낙네들의 움직임도 부지런해진다. 손님인 듯 모여 담소를 나누던 주민들이 두 팔을 걷고 일손을 돕는다. 애당초 그런 구분이 무의미한 듯 손발이 척척 맞는다.

일렬로 늘어선 찜통이 층층이 쌓여 방앗간을 뿌옇게 할 만큼 연기를 피우는 사이 한 쪽에선 전날 뽑아 말려 놓은 가래떡을 떡국떡으로 잘라내느라 부산스럽다. 동시에 또 한 쪽에선 들깨와 참깨를 볶는 ‘꼬순향’이 솔솔 풍기며 코끝을 간지럽힌다.

오랜 기다림 끝에 완성된 찜통의 떡을 가래떡 뽑는 기계로 붓고 으깬다. 두 줄로 뽑은 가래떡을 물에 담근 뒤 다시 한 번 으깨는 과정을 거쳐 가래떡을 뽑는다. “가래떡은 이 맛이제.” 가래떡을 주문한 한 주민이 갓 뽑은 떡을 손 한 뼘 가량 뚝 떼어 건넨다. 체면치레 없이 덥석 받아먹는다. 뜨뜻하고 쫀득하니 조청이 없어도 달고 맛나다.

능파방앗간은 한 자리에서 3대째 이어오고 있는 마을 방앗간이다. 현 주인인 강씨의 할아버지 대부터 내려오고 있으니 지나온 세월만 족히 100년을 헤아린다. 이날 콩떡을 맞추러 온 한 할머니(85)도 “나가 여그서 나고 자랐는디 어릴 때도 왔다갔다 했응게 솔찬히 됐을 거여”라며 방앗간의 이력을 본인의 삶에 비춰 셈한다.

한 세기가 넘도록 마을 방앗간을 드나들었던 주민들의 발걸음이 켜켜이 쌓은 세월을 이어 오늘에도 이어진다. 떡이며 기름이며 때로는 ‘달고 쓴’ 인생사를 나누며 능파방앗간의 손 때 묻은 미닫이문을 열고 닫았을 주민들에게 강씨가 말한다. “항꾸네(함께) 또 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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