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마을총회 하는 날

  • 입력 2017.01.08 21:50
  • 수정 2017.01.09 15:21
  • 기자명 심문희(전남 구례군 마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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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아침부터 마을방송이 울려 퍼진다. 일 년에 한번 마을총회를 하는 날! 부녀회원들은 어제 청년회원들이 잡은 돼지 한 마리로 순대를 만들어야 하는 날이다. 11시부터 마을총회가 시작되니 12시에 맞추어 점심을 준비해야 한다.

문제제기할 시간도 용기도 없다. 옛날부터 지금껏 이어져온 일에 문제제기를 한다는 건 공동체 내에서 왕따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함께 해야 할 일에 나서지 않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열일을 제쳐두고라도 마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만 한다. 벌써 내 나이 오십이 다되도록 신년 새해부터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부여된 역할은 여전하기만 하다.

마을총회의 성원은 물론 마을구성원 모두를 말한다. 작년 마을 이장선거엔 한 집에 한 사람씩 표를 행사한 기억이 있다. 할머니 한 분만 사시는 1인 가구를 제외하곤 대부분 가장이라는 명분으로 남성가구주의 몫이다. 농가단위 가족단위가 당연하게 여겨진다.

이장님은 일 년 동안 마을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에 대한 수입, 지출, 공동 작업한 내용들에 대한 보고를 한다. 그리고 새로 전입한 두 가족이 인사를 한다. 그나마 우리 마을은 심심찮게 귀농하신 분들이 계신 덕에 거주하는 인구수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다.

회관을 빙 둘러보니 그래도 할머니 몇 분이 보이긴 하지만 총회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은 남성들이다. 여성들이 이장을 하고 있는 마을도 있긴 하지만 바쁜 남편의 후광을 얻어 누구의 부인으로 역할을 대신해 부여받은 경우가 허다하다. 여성이라는 리더십이 발휘되기는 힘든 출발인 셈이다.

몇 해 전 어느 마을에선 이장에서부터 부녀회장, 개발위원장 등 마을의 임원 전체를 여성으로 구성했다. 마을만들기 사업에서부터 의욕적으로 사업을 진행해 나갔지만 마을구성원들로부터 강한 저항에 부딪혀 끝내 포기하고 손발을 든 이야기다. 농촌사회 전역에 팽배한 성역할 고정관념을 깨기가 생각보다 힘겨웠다고 말씀하셨다.

마을총회 하는 날 부엌에서 맛있는 점심상을 차려야 할 사람들이 회관 안방에 모여 마을의 일년 구상을 이야기 하면 밥은 누가 하냐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버젓이 오간다.

대통령이 여성이면 뭐하냐, 앞으로 100년 이상 여성이 대통령 하는 건 꿈도 꾸지 말라는 등 총회 뒤풀이 자리에서 어김없이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성대통령이 아니라 유신공주였지만 어쩌다 여성 모두를 향해 얼굴이나 꾸미는 사람들이란 말을 거리낌 없이 듣게 되다니 참 씁쓸하기만 하다.

2017년 새해가 어김없이 시작됐다. 차별을 인정하고 굴복하며 살 것인지 힘겹지만 차별에 저항하며 인간의 존엄 회복을 위해 싸워나갈 것인지, 농촌사회의 전 구성원이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세상 함께 만들어 가는 길을 미루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주인은 이 땅의 여성농민들, 바로 우리니까.

기분 탓인지 점심 먹은 게 목구멍에 그대로 걸려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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