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 모기약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28

  • 입력 2008.04.06 04:48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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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가뭄 끝에 꽤 많은 비가 내렸다. 마을 앞 강바닥이 바짝 말라붙은 지가 오래 되어 한 며칠쯤 왔으면 싶지만 오후 늦게 비는 그치고 말았다.

오전에는 아내가 큰놈에게 가는데 동행을 원했지만 나는 다른 볼일이 있어 대구에 갔다가 해질 무렵에 돌아오니 집 입구 거름자리가 앙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흠뻑 비를 맞은 땅에 대형차 바퀴가 굴러다니면서 심하게 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옆에는 자잘하게 깬 돌을 수북하게 부어 놓았다. 문제는 그 거름자리가 며칠 전에 채전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비 온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경로당에 나가지 않는 오전 며칠이나 호미로 일구어 여러 가지 씨를 넣었다. 그런데 대구에 살면서 별장쯤으로 삼고 있는 앞집 주인이 마당에 깬 돌을 깐다고 싣고 온 15톤 화물차 세 대가 채전을 모조리 망가뜨렸다는 것이었다. 앞집은 워낙 길에 바짝 붙여 지은 터라 담장을 허물지 않고는 대형차가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회전을 하려면 우리 거름자리를 이용하지 않고는 진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씨앗은 사다 준다 카는데 즈그가 참나물 씨앗은 참말로 구해 올 수 있을랑가 몰따.”

어머니는 생각과 달리 차분한 얼굴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대구에서 미장원과 도배 일을 한다는 이들 부부는 처음 이 땅을 산 십여 년 전부터 올 때마다 음료수 같은 것들을 하나씩 들고 와 일찌감치 어머니의 환심을 사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남자가 영 탐탁치 못하다. 일 없는 날이면 곧잘 달려와서 트럼펫으로 뽕짝을 연주하는데 그 솜씨가 젬병이다. 귀를 찢는 날카로운 금속성의 트럼펫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기가 일쑤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 남자는 도착만 하면 뽕짝을 틀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데 여름철에는 자주 내 글 쓰는 일을 훼방 놓는다. 창문을 다 닫아도 흘러간 뽕짝의 애절한 소리는 비집고 들어와 생각의 실마리를 툭, 툭 끊어버리고는 했다.

나는 어지러운 자리를 대충 손본 뒤 복숭아 작업장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올해 선별기를 좀 더 큰 것으로 교체하기로 했는데 먼저 헌 선별기를 오늘 가져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헌 선별기를 들어내고 고르지 못한 바닥을 손보고 옛날에 불 때서 살던 시절 굴뚝을 세웠던 자리도 들어내야 공간을 많이 확보할 수가 있었다. 늘 장마 때면 자리가 좁아 차가 작업장 안으로 들어오질 못해 애를 먹곤 했던 처지라 서둘러야 할 형편이었다.

“이게 뭐고? 이게 그때 그거 아이가?”

돌아보니 선별기 뒤쪽에 세워둔 케비넷 속을 정리하던 어머니가 락카 통을 들여다보고 계신다. 아 그때 그것, 락카. 나는 삐어져 나오는 웃음을 꽉 깨문다.

오래 전 일이다. 저물어 일을 마치고 마루로 올라서는데 마구 역정을 내시는 것이었다.

“니는 어디 가가 이따구 모기약을 사 왔노. 당장 가가 방 도배 새로 해내라고 따져라. 니가 안 가믄 내라도 갈란다. 어데고? 마실 점방에서 샀나?”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어머님 방에 들어갔다가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사방 벽 여기저기와 장롱 문짝에까지 붉은색 스프레이를 처발라 놓은 것이 마치 어머니가 방을 상대로 격렬하게 데모를 해버린 꼴이었다. 나는 기가 차서 어머니를 돌아보았더니 당신 손에는 아직도 붉은색 락카 통이 쥐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락카를 에프킬러로 알고 뿌려댄 것이었다. 나는 락카 통을 빼앗아 마당으로 던져버렸다.

기억은 오래되어 희미하지만, 그 붉은색 락카는 농민회 무슨 집회에서 건물 벽에다 구호를 쓰고 남은 것으로, 베어낼 복숭아나무 둥치에 미리 표시를 해둘까 싶어 몰래 들고 온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께 그것은 에프킬러가 아니라고 설명을 했더니 왜 그런 것을 말도 안 하고 마루에 두었느냐고 역정을 내신다.

“아따, 데모를 이만큼이 시게 해뿌렀는기요. 글치만 앞으로 귀신은 절대 못 오겠구마.”

혼이 나간 표정으로 방바닥에 펑퍼져 앉은 어머니 왼쪽 발목에도 큼지막한 붉은 반점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붉은 반점을 바라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혓바닥을 깨물어야 했다. 도태시킬 복숭아나무 둥치에 붉은색으로 표시해 두려던 그 색깔이 어머니 발목에도 칠해져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병국이 형도 우리 집에 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앞니를 깨물며 웃던 기억이 선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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