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미운 손가락

  • 입력 2017.01.01 20:41
  • 수정 2017.01.02 09:32
  • 기자명 정은정 <대한민국치킨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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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 전쟁 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 김준태 ‘감꽃’

1,700만, 2,100만… 숫자 세기를 멈춘다. 감꽃도 아니고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어 보듯이 죽임 당한 닭의 마리를 세어보다가 새해를 맞이했다. 그것도 닭의 해에 쓰는 첫 글부터 이렇게 죽음 타령이니 쓰는 필자인 나도 읽는 독자도 마음 아리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12월 연말에 벌써 닭과 오리 2,600만 마리가 땅에 묻혔다는데 이 글이 실릴 1월에는 저 숫자가 얼마나 불어나 있을까.

사실 닭이 죽든 말든 소비자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그래서 계란 값은 얼마나 오를 건데?’ 계란, 참기름, 김. 저 세 조합으로 어물쩡 키워온 애 엄마가 나 하나뿐이랴. 계란이 없었다면 도시락 여섯 개를 매일 싸야했던 엄마는 얼마나 더 힘겨웠을까. 갑자기 차려내야 하는 웃어른 밥상에 계란말이나 계란찜이라도 하나 얹어 놓으면 그 민망함이 덜어진다.

영양의 균형이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 계란의 완전성이랄까. 고운 색감과 부드러운 식감, 그리고 밥을 차리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허투루 차린 밥상이 아니라는 무언의 인증 같은 것이기도 하다. 충북 내륙의 친정 제사상에는 찐 계란을 올리곤 했다. 갯것이 부족한 지역에 정성을 다한 제사상에 계란이라도 올리는 그 마음도 이제는 전설 속에나 묻힐 이야기다.

쌀과 계란. 근대 농업 사회에서 농가에서 환금할 수 있는 대표적인 농산물이었다. 그러던 계란이 가장 흔한 식료가 되었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축산정책은 복합사료공장과 다산계 종축도입이었다. ‘레공닭’이라 불리던 산란용 레그혼 닭도 그 시절 도입되어 우리 밥상의 한축을 책임졌다. 산란 양계부터 시작된 한국의 축산업은 본궤도를 넘어서 소비되는 양보다 늘 웃돌게 생산되어 오랫동안 저가에 시달렸다. 농가는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상태에서 계속 계란을 생산했다.

이번 조류독감의 원인이 공장식 밀식 사육이라고 다들 손쉽게 지적하지만, 저가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대량생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농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적 있는가. 소비자들은 계란 한 알에 500원이어도 괜찮겠는가. 나 또한 자신이 없다.

달걀은 가장 만만하고 싼 식료가 되어 냉면 위에 메이크업용으로 올라가거나 고깃집 구색 갖추기 밑반찬으로 등장했다. 밀가루와 계란이 만나면 그럴싸한 빵과 과자가 만들어지니 가공식품 산업의 역군이다. 그래서 늘 고만고만한 가격으로 밑밥이나 깔아줘야 하는 ‘저가 대량생산’ 체제의 희생양이었다.

여기저기 피울음 소리가 들린다. 국가의 방역실패로 속수무책 당한 양계 생산자들은 이 죽음의 맏상제가 되었고, 근근이 계란으로 버텨왔던 분식집이나 동네의 작은 제과점들은 속속 영업포기를 선언한다. 하루에 3,40판의 계란이 필요한데 그마저 구할 수도 없고 가격을 감당할 수 없으니 말이다.

노인정에서 주는 한 끼가 전부인 이빨 성치 않은 노인들의 밥상에 자리를 잡고 있던 계란찜의 효성도 당분간은 멈추리라. 자기의 운명도 모른 채 파헤쳐진 구덩이로 들어가서 허토 당하는 닭의 피울음 소리는 새벽을 깨우는 소리보다 더더욱 준엄한 인간을 향한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 무엇을 세고 있는가. 전쟁 통에 죽어가는 병사의 머리를 세어보듯 죽어간 닭들을 세고 있는 내 손가락이 밉다. 엄지손가락에 침을 발라 돈이나 세고 있는 나란 인간이 미워지면서 시작하는 ‘닭의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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