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시골극장 ②] 토키영화 ‘불멸의 밀사’ 개봉 박두

  • 입력 2016.12.31 10:53
  • 수정 2016.12.31 10:55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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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육칠십년 대에 농촌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이 모처럼 만나 소싯적 일들을 이야깃거리로 삼을 때면, 읍내에 한두 개씩 있던 이른바 삼류극장은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 되는 추억의 공간이다. 영화 이외에는 변변한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한 학기에 두세 번 있는 단체관람은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뿐만 아니라 이성에 눈 떠갈 무렵의 중고등학생들에게는, ‘미성년자 입장불가’라는 그 금도의 선을 넘어보고 싶은 욕구 또한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읍내 극장 간판에 남녀 주인공의 좀 거시기한 그림이 내걸릴 때면, 극장 앞에 매우 괴이한 행색의 애어른들이 등장했다. 삼촌의 양복을 헐렁하게 걸치고 아버지의 중절모자에다 넥타이까지 매고 나섰지만, 여드름이 송송 솟은 얼굴의 풋내까지는 감출 수가 없었다.

요행히 극장 안에 들어갔다 해도 교외지도 나온 선생님과, 극장 뒷자리 한쪽에 버티고 있던 임검 경찰관의 눈초리가 두려워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졸여야 했으니….

 

그 시절 극장구경에 얽힌 이런저런 추억들이야 누구나 한 보따리씩 간직하고 있을 터, 따라서 개개인이 ‘관객’으로서 경험했던 그 낱낱의 추억보다는, 아예 시골극장을 ‘운영’했던 사람들의 경험이라면 좀 색다르지 않을까 여겼다.

그래서 서기 2002년에, 아직도 옛 시골극장의 모습을 지닌, 조금은 예스럽고도 적당히 남루한 그런 극장이 어디 없을까 수소문한 끝에, 전북 군산에 있던 국도극장을 찾아갔다. 당시엔 군산에 국도극장 외에 우일시네마극장도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두 극장의 주인이 같은 사람이었다. 극장주인 박주일씨(지금은 80대 중반쯤 될 듯)는 해방직후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군산극장(뒷날의 우일시네마극장)에 잡일꾼으로 취직을 했다가, 종국에는 아예 그 극장을 인수해서 운영을 해오고 있으니 평생을 군산에 있는 극장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풀어놓은 옛 시절의 시골극장 얘기는 참말 푸지고도 재미졌다.

 

1948년 군산극장.

허복만 기도주임이 극장 종업원들을 모아놓고 교육이 한창이다.

“새 영화의 포스터가 나왔다. 시방부터 포스터를 붙이러 나갈 것인디, 느그들은 우리 군산극장의 선전원으로서, 누가 물어보면 최소한 영화 제목은 알고 대답을 해줘야 안 쓰겄냐. 포스터에 영화 제목을 한문으로 써놔서 잘 몰르겄제? 제목은 ‘불멸의 밀사’다. 외워라 외워. 감독은 김영순이라는 분인디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잉. 자, 나가기 전에 질문 있는 사람?”

“이번 영화 설명해줄 변사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아, ‘불멸의 밀사’는 변사가 필요 없는 토키 영화다.”

“영화에 사람은 안 나오고 토끼만 나온다고라우? 그래도 변사가 설명은 해줘야 쓸 것인디?”

이 무렵에는 무성영화가 대세였지만, 음성과 음악이 영사막과 동시에 나오는 토키(talkie) 영화도 간간이 상영했다.

대체로 청소년들인 극장의 잡일꾼들이 각자 정해진 구역을 향하여 포스터를 옆구리에 끼고 선전활동을 나간다. 아이스께끼 가게며 밥집이며 세탁소 등지를 돌며 포스터를 붙이는데 풀칠을 하지 않고 압핀으로 부착한다. 극장에서 초대권을 발행했던 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고 해방직후인 이 시기에는 포스터를 부착한 가게의 주인들에게 50% 할인권을 주었다.

“그 대신에 이 포스터 누가 손 못 대게 잘 감시해 주씨요 잉.”

포스터를 붙이러 나온 극장 종업원이 가게 주인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영화상영이 끝날 때까지 그 포스터가 멀쩡하게 붙어 있어야 할 이유가 따로 있었다. 상영을 마치면 극장 종업원들은 붙였던 포스터를 조심스럽게 떼어 모아서 영화사 측에 돈을 받고 팔았다. 다음 극장에 가서 상영을 하자면 포스터를 새로 인쇄해야 하는데 인쇄경비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극장 종업원들로부터 그것을 되사들여서 재활용을 했던 것이다. 종업원들에겐 포스터를 떼어다 팔고 받은 그 돈이, 집안 식구들을 먹여 살릴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던 것이다. ‘문화와 예술’은…그만큼 배가 고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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