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그 기나긴 싸움

  • 입력 2016.12.25 14:33
  • 수정 2016.12.25 14:4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용탁 소설가]

한-미 FTA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정점을 찍는 일대 사건이었고 그만큼 자본과 민중의 대결 또한 길고도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노무현 정권 때인 2005년에 시작되어 2011년 이명박 정권하에서 완전하게 체결된 조약이지만 그 뿌리는 더 깊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1989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는 ‘아태지역국가들과의 FTA 체결에 대한 검토 보고서’에서 미국에게 바람직한 FTA 대상 국가로 싱가포르, 대한민국, 대만을 꼽으면서 한-미 FTA 체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애초에 미국의 주도로, 미국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된 협정이었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 하위체제로서 한국은 비주체적 협상 파트너였다. 

미국은 세계 제일의 농산물 수출 대국이었고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은 한국 농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했다. 협정 체결 시 국내 농산물 생산액은 최대 8조 8천억 원까지 감소할 것이며 농업소득은 40%까지 감소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한 마디로 한-미 FTA는 한국 농업의 대재앙이 될 것이었다. 이는 협정 체결 5년이 지난 오늘, 분명한 현실이 되었다. 

2011년 10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 참석한 농민들이 ‘한-미 FTA 국회비준 반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농업 붕괴의 막이 오르다

2005년 2월부터 불과 세 달 동안 한국과 미국은 세 차례에 걸쳐 한-미 FTA 사전실무회의를 갖는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열린 이 회의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우리 사회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듬해 2월 3일,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한-미간 자유무역협정의 공식 협상 출범을 선언한다. 설 연휴가 끝나고 모두가 잠든 새벽 5시였다. 이때까지 우리나라가 정식으로 체결한 FTA는 한국과 칠레 사이에 맺은 게 유일하였다. 

칠레와의 협정은 주로 농업계에서 반대를 했고 사회적인 관심은 크지 않았다. 강고한 농민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칠레와의 협정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농민들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더 이상 농민들만의 투쟁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범국민적인 연대를 통해서만이 효과적인 저지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농민운동 진영은 우선 농업계를 중심으로 ‘한-미 FTA 농축산물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 영화인대책위, 소비자대책위, 교육대책위 등으로 구성된 ‘한-미 FTA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결성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였다.

2006년 3월, 발족한 범대위에는 농축수산, 금융, 공공, 영화인, 문화예술, 보건의료 등 14개 부문대책위와 전농, 민주노총, 한국노총, 민주노동당 등 800여 개 단체가 망라되었다. 또 모든 광역지방자치단체에 지역 대책위도 꾸려졌다. 

노무현 정권은 협상 내용을 비밀에 부치고 진행 자체도 폭력적이었다. 민중 진영이 본격적으로 반대 투쟁에 나선 7월 10일의 기자회견부터 정권은 과도한 물리력을 동원하였다.  

‘한-미 FTA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의 대표자들은 오전 9시부터 신라호텔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자 했으나,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했다. 대표자들은 합법적 집회 신고를 해 놓은 데다, 기자회견의 경우에는 언제 어느 장소에서도 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무려 500여 명을 투입해 기자회견 자체를 원천 봉쇄했다.

경찰들의 봉쇄에 FTA범국본은 “미국 백악관 앞에서도 평화적인 시위는 보장되었고, 자유로운 의사표현은 가능했다. 한국 경찰은 이 기자회견을 막을 권한이 없다”고 분개했다. 

한 시간 넘게 경찰과 실랑이를 벌인 대표자들은 동대문입구 전철역 쪽으로 물러나 약식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대표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중들은 나프타 이후 최대라고 하는 한-미 FTA 협상 내용에 대해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우리 삶을 건 한-미 FTA 협상은 어두운 밀실에서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며 민중들이 내놓은 한-미 FTA의 파멸적인 결과들에 대해 한국 정부는 증거 없는 추측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한-미 FTA가 타결 된다면 한국 사회는 또 다시 미국과 다국적 자본 그리고 한국의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 구조조정의 강풍 속에 내몰릴 것이고 이 과정에서 경쟁의 논리 앞에 농업환경 의료 교육 공공서비스를 비롯해 그 어느 것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민중의 삶이 송두리째 위기로 내몰릴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 FTA에 반대하는 성난 민중들의 분노를 밟고 계속 한-미 FTA를 추진한다면 노무현 정부야 말로 그 끝을 향해 치닫는 것과 다름없다.”

농민운동은 공식 협상이 개시되면서부터 가장 발 빠르게 대응했다. 전농은 조직 내적으로 지도부의 시군 순회 간담회, 마을 간담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대규모 상경투쟁과 트랙터와 차량 시위, 두 차례의 미국원정 시위 등을 벌였다.

또한 각 시군 한-미 FTA 반대 깃발달기 운동을 펼쳐 전국이 반대 깃발로 넘실거렸다. 대중적 여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한-미 FTA  반대 만화책 수십만 부를 제작하여 배포하였고 영화인들과 함께 ‘고향에서 온 편지’라는 방송 광고를 제작하기도 했다. 농민들이 나락을 모아 만든 이 광고는 정부의 검열에 걸려 음성이 삭제된 채 자막을 넣어 광고를 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지난 2011년 11월 ‘한-미 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대표자들이 한-미 FTA 국회비준을 강행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규탄하고 있다.

전 민중의 항쟁으로 

한-미 FTA는 효순, 미선이 사건과 미군기지 평택 이전 등과 더불어 미국이라는 제국주의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규제하고 파괴하는지 총체적으로 드러내준 일대 사변이었다. 민중들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해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한-미 FTA야말로 그것의 최고 결정판이었다. 반대의 열기가 지속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2006년 11월 22일에 시작된 ‘100만 민중총궐기 투쟁’은 노농연대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이 폭넓게 참여하는 조직대중의 투쟁이었다.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농민들은 총궐기를 성사시켜 실질적인 노농연대를 실현할 수 있었다. 특히 노동자들은 농민들의 투쟁에 크게 고무되어 향후 한-미 FTA 반대투쟁에서 노동연대는 기본적인 틀이 되었다. 광역별로 진행된 22일 각 도청 앞 투쟁은 노무현 정권이 강행하는 협상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폭발하였다. 

이 날의 시위는 노무현 정권 들어 최대의 규모이자 가장 격렬한 사태였다. 한-미 FTA 반대 투쟁에 나선 농민들과 총파업에 돌입한 민주노총 조합원 등 10만여 명이 전국 13개 시에서 시위를 벌여 일부는 공공기관 진입을 시도하고 경찰과 충돌하였고 분노한 민심은 화형식 등 도심에서 불을 지르기도 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시•도민 궐기대회에 참가한 농민과 노동자, 대학생 등 1,000여명이 시청 진입을 시도하며 경찰과 격렬히 대치했다. 이들 중 300여명이 각목과 죽봉을 휘두르고 보도블록을 던져 대형 유리창 40여장이 부서졌다. 경찰 방패와 방석모 등 진압 장비를 빼앗아 불태우기도 했다. 이날 오전에는 호남고속도로에서 농민 3,000여명이 차량과 함께 도보 행진을 벌여 1시간여 동안 교통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대전에서는 시위대가 충남도청 향나무를 불태우고 담 일부를 무너뜨렸다. 강원도청 앞에서는 민노총 조합원들이 도청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과 충돌, 10여명이 다쳤다. 시위대는 상여를 태우며 FTA 화형식을 벌였고 도청 정문을 무너뜨렸다.

전국교직원노조, 민노총의 집회와 한-미 FTA 반대집회가 잇따라 열린 서울 도심에서도 시위대의 거리 행진이 이어졌다.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한 민노총도 서울광장 등 전국 13개 지역에서 총파업 결의대회를 열고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 한-미 FTA 협상 저지를 촉구했다. 

2007년 대선을 거치는 중에도 한-미 FTA는 지속적으로 추진되었고 그 와중에 미국산 수입 쇠고기에서 뼛조각이 검출되어 검역주권 문제가 떠올랐다. 결정적으로 2008년 4월 막 취임한 대통령 이명박은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30개월령 이상의 쇠고기 연령 제한 폐지와 광우병 소의 수입 허용을 골자로 하는 제 2차 협상을 타결하였다.

정부는 안전하다는 선전에 열을 올렸지만 먹거리에 대한 우려는 마침내 전 국민적 분노에 방아쇠를 당겼다.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2개월 동안 연일 촛불집회가 개최되고 규모 또한 수십만에서 100만을 헤아리는 규모로 발전하였다. 촛불 시위는 점차 격렬해져 청와대 진격투쟁으로 이어졌고 정권은 민심에 등을 돌리는 명박산성으로 맞섰다. 

전농을 비롯한 농민들은 전 조직력을 동원하여 미국의 식민지 공고화 책동을 분쇄하고자 간고한 투쟁의 길에 나섰다. 2006년부터 기나긴 투쟁의 과정 속에서 수많은 집회와 시위를 하였고 워싱턴과 제주도를 오가며 원정투쟁을 벌였지만 결국 2007년 체결된 한-미 FTA를 막지 못했다. 그리고 재협상이 없다고 단언했던 이명박 정권의 추가 재협상도 막지 못했다. 협정의 내용은 무수히 많고 복잡하여 별도의 책이 나올 정도였지만 미국 언론의 평가대로 그것은 ‘미국 대통령의 승리’였다. 

우리나라 농민운동이 걸어온 길은 그대로 우리 민족과 민중이 겪은 수난의 역사였으며 여전히 미완의 노정 속에 있다. 비록 인구의 5%에 불과한 소수 계급이 되었을지언정 농민과 농업은 이 나라의 근본이다. 민중이 주인이 되는, 언젠가 올 그 날에 농민운동의 역사는 새롭게 쓰일 것이다.

* 한국농정신문 재창간 10주년 특별 기획 ‘농민운동 현장을 찾아서’는 이번호로 연재가 종료됩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