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농민운동의 구심점이 되다

  • 입력 2016.12.25 02:10
  • 수정 2016.12.25 02:12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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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정현찬 가톨릭농민회 회장 및 회원들이 지난 1월 29일 서울 미금동 경찰청 앞에서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 책임자 처벌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청장 파면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3만명의 농민이 서울에 모였던 2015년 11월 14일. 숭례문 앞에서 쌀값 보장, 농산물값 보장을 부르짖던 농민들은 이내 10만 민중총궐기 대오에 합류해 광화문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경찰은 그 길목인 종로구청 사거리 부근에서 차벽과 물대포로 이들의 행진을 굳게 막아섰다.

누구도 선뜻 앞으로 나가기를 주저하던 찰나,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성큼성큼 걸어나가 경찰버스에 연결된 밧줄을 움켜잡았다. 경찰은 절호의 표적이 된 그를 놓치지 않았다. 강화유리마저 종이 찢듯 부순다는 물대포가 그를 덮치자 그는 속절없이 초겨울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찧어야 했다.

‘전남 보성 농민, 경찰 물대포 맞아 중태.’ 그가 병원에 이송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방송과 인터넷에서 앞다퉈 속보가 쏟아져 나왔다. ‘농민 백남기’의 이름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당시 농민대회를 주도했던 ‘농민의 길’ 소속 4개 농민단체는 이튿날부터 백남기 농민이 입원한 서울대병원 앞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이내 120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대책위가 구성돼 부당한 국가폭력을 규탄하는 싸움이 시작됐다.

그렇게 시작한 농성이 317일 동안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농성장을 찾는 발걸음도 마냥 처음 같지만은 않았다. 매일저녁 진행되던 촛불집회는 올해 1월부터 주2회, 2월부터는 주1회로 잦아들었다.

하지만 농민들의 가슴엔 제대로 불이 붙었다. 지역마다 십수명씩의 농민들이 교대로 올라와 농성장을 지키며 대학로 곳곳에서 피켓을 들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기자에겐 예외 없이 백 농민의 상태를 물었고, 집회문화에 상대적으로 부정적이라는 영남지역 산골의 촌로들조차 서로 백 농민 얘기를 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서울 상경집회는 물론 지역마다 열리는 크고 작은 집회에서도 백 농민의 이름을 가장 전면에 내걸고 모두가 “내가 백남기다”를 외쳤다.

지난 5월 14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백남기 농민 자택 일대에서 열린 ‘일어나요 백남기님! 함께 가요 밀밭으로! 생명과 평화의 밀밭걷기’ 행사에 참석한 농민 및 시민들이 밀밭을 따라 걸으며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기원하는 노란 리본을 매달고 있다. 한승호 기자

“농사짓게 해 달라”며 절규하는 농민을 무력으로 쓰러뜨리고 일언반구 사과조차 없는 정부의 태도는, 그 동안 희생당하고 억압받아 온 농민들의 막연한 분노를 한 데 쏟아부을 수 있는 실체를 제공했다. 백 농민이 아닌 그날의 농민 누구에게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며, 농업과 농민들을 바라보는 정부 시선의 한 불편한 단면이 농민들의 눈에 포착된 것이었다.

“쌀 전면개방 시대에 식량주권이 완전히 무너져 가고, 특히 이 정권 들어 밥쌀용 쌀을 계속해서 수입하고 있다. 이것을 막기 위해 나왔던 백 농민을 쓰러뜨린 것은 결국 이 나라 농업을 짓밟은 것이다.” 정현찬 농민의길 상임대표의 말처럼 백 농민은 우리 농업·농민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된 시점에서 농민들의 투쟁은 그 이전보다 한층 더 절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백 농민의 불행한 사건은 전국 수많은 농민들의 눈시울을 적셨지만, 역설적이게도 올 한 해 농민들이 연대를 다지고 투쟁의지를 드높이게 된 가장 근본적인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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