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의 죽음, 격동하는 농민운동

  • 입력 2016.12.25 02:08
  • 수정 2016.12.25 02:1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지난 9월 25일 백남기 농민은 무려 317일 동안 생사를 넘나든 끝에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사망 직후 경찰은 “사인을 규명해야 한다”며 부검을 시도했고 대책위는 또다시 시신을 사수하기 위한 격렬한 투쟁을 시작해야 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사인을 가해자인 경찰이 조사해 왜곡하려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논란의 빌미를 제공한 서울대병원 백선하 교수의 사망진단서가 외압을 받아 작성됐다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여러모로 꺼림칙한 정황에 국회와 여론도 진상규명에 팔을 걷어붙이던 참이었다. 백 농민 사망 보름 전엔 강신명 전 경찰청장 등 경찰 고위책임자들을 증인으로 한 이른바 ‘백남기 청문회’가 열렸고, 사망을 전후해선 때마침 국정감사가 열려 국회 안행위·보건위 위원들이 강도 높은 심문을 진행했다.

지난 11월 6일 광주광역시 금남로에서 열린 고 백남기 농민 민주사회장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5.18 망월동 묘역으로 행진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하지만 논란은 해결되지 않았다. 경찰도, 백선하 교수도 꼿꼿한 자세로 의혹을 전면 부인했으며 의원들이 제기하는 결정적 증거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청문회 이전 강신명 청장은 영예로운 퇴임식을 치렀고 신임 이철성 청장도 사건에 대해 강 청장과 같은 기조를 유지했다. 대통령은 1년이 가깝도록 사건과 관련한 단 한 마디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백 농민 사건을 두고 한 해를 관통했던 농민들의 분노는 결국 이 시점에 절정을 맞았다.

백 농민 부검 반대 투쟁은 이런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법원의 어중간한 부검영장 발부로 인해 농민과 경찰의 갈등은 장기 국면을 맞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시민들의 참여다. 몇 차례 고비 때마다 300여명의 시민들이 농민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지켰다. 결국 부검영장 만료일인 지난 10월 25일 경찰은 성난 농민과 시민들에 막혀 부검 집행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홍완선 당시 종로경찰서장은 “영장을 집행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투쟁본부에게 있다”며 멋쩍은 뒷말을 남겼다.

이날의 투쟁은 비록 부검이라는 국지적인 틀에서 이뤄졌지만, 농민들은 시민들과 함께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 승리했다는 점에 큰 의미를 새겼다. 이후 범국민 촛불시국에서 농민들이 보다 자신있게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을 얻은 것이다.

백 농민의 영결식은 사망 41일만인 지난달 5일에야 이뤄졌다. 민주시민장으로 치러진 이날 영결식엔 5만명의 시민들이 참석해 백 농민을 배웅했다. 그리고 바로 이날 저녁 박근혜정부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역사적인 첫 범국민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정권의 부도덕한 모습에 분개하고 이에 맞서 온 농민들의 투쟁이 서울대병원의 수백명에서 광화문의 5만명으로, 그리고 다시 100만명으로 확산된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