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숨차는 김장담기

  • 입력 2016.12.24 00:13
  • 수정 2016.12.24 00:53
  • 기자명 심문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지금도 품앗이가 살아있는 몇 안 되는 일 중의 하나는 바로 김장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조를 짜 움직인다. 한 달여 동안 집집마다 김장이 끝나야만 김장은 비로소 마무리된다.

오늘은 진주댁네 내일은 본동댁네 김장하는 날. 사이사이 비는 날이 있다고 쉬는 건 아니다. 김장이 마무리되기까지 거쳐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조금 더 젊은 할머니들은 양념을 만드는 일을 더한다. 무를 씻고 다듬고, 한편에선 파와 미나리를 다듬는다. 내일은 수육이 삶아질 솥단지지만 오늘은 찹쌀풀 쒀내느라 정신이 없다. 방금 전 끓여낸 육수는 아직 식지 않았다. 다시마에 디포리, 양파 등 바구니에 보이는 것을 보니 육수 맛이 가늠이 간다. 청각 구석구석 행여나 모래나 조개껍질 씹힐까 바구니에 쓱쓱 씻는다.

초벌양념을 섞는다. 먼저 찹쌀풀에 육수를 넣고 고춧가루만 넣어 섞는데 간기가 없어야 고춧가루가 제대로 빛을 낸다고 한다. 좀 풀어진 듯하면 액젓, 새우젓, 마늘 생강, 청각을 넣어 섞어준다. 다들 200~300포기는 기본이라 초벌 섞기 작업은 장정들이 하기에도 힘이 드는 일이건만 다들 내색 없이 쓱쓱 비벼 섞는다. 본격적인 채썰기에 들어간다. 채칼을 든 두 분은 쉴 새 없이 무를 잡아당긴다. 조선갓에 쪽파, 대파, 미나리가 썰어진다. 초벌양념에 모두 섞어 양념이 만들어진다. 큰 대야 2개 정도면 500포기는 거뜬하다. 이제 간이 든 배추를 씻는다. 두 번, 세 번은 씻어야 한다. 저녁내 물이 빠져야 하기에 거꾸로 차곡차곡 씻어서 건져둔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장에 나가 생새우와 굴을 살 것이다. 어차피 발효될 것임에도 생새우와 굴은 신선함이 생명이라고 미리 사두지 않는다. 물론 돼지고기 앞다리도 냉동육이 아닌 생고기로 준비하고 눈깔이 살아있는 생태를 사서 끓여먹어야만 김장이 마무리된단다.
아침부터 분주하다. 빙 둘러앉아 배추 속을 넣기 시작한다. 옛날 같으면 김장독이라도 묻는 역할을 남자들이 했으련만 지금은 집집마다 김치냉장고가 있어 그 일마저 없는 영감님들은 언제나 수육이 삶아질까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다. 박스가 접어지고 서울로 광주로 조선천지 가족들 숫자만큼 김장 택배박스가 포장된다.

이런 풍경을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며칠 전 하필이면 제일 추운날 배추를 뽑자는 엄마에게 “그냥 절임배추 사서 하자니까?”했다가 된통 소리를 들었다. 마늘을 캐면서도 고추를 따면서도 나는 언제나 “그냥 사서 먹자니까”하고 엄마는 “이런 것 까지 사먹으면 그게 어디 농부냐, 그러려면 도시서 살지 그러냐”하고 큰소리를 치신다. 땅이 있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다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하시는데, 바보 같은 농사가 이래서 지금껏 이어진 것일까. 말하기도 벅차고 글로 쓰기도 벅찬 김장. 집집마다 손맛 다르고 입맛 다른 김장김치가 비벼지고 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