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시력에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현장 인터뷰]전북 완주 한우농가 박대길씨

  • 입력 2016.12.18 10:29
  • 수정 2016.12.18 10:55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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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전북 완주 한우농가 박대길씨

“난 천천히 걸어야 겄어. 다리도 부실 허고.”

서울 용산전쟁기념관에서 광화문광장으로 향하는 농민들의 행진대열이 길게 늘어섰다. 매연 뿜는 희뿌연 아스팔트길을 걷는 맨 끝자락. 누구한테랄 것도 없이 혼잣말을 하는 농민 곁에 섰다. 한우 80여 두를 키우는 전북 완주의 박대길(68) 농민의 12월은 여느 때와는 이렇듯 달랐다. 자기소 80여두, 농협 위탁소 80여두 160두 남짓 키우고 있는데 올해는 나라가 뒤숭숭하고 김영란법 때문에 한우 값이 떨어져 ‘낭패’라고 했다. 한우 키우는 거 보러 한번 내려가겠다, 고 하니 얼굴은 잘 안보이지만 목소리는 정확히 기억한다면서 연락처를 건네주신다. 녹내장 때문에 시력이 좋지 않아 세상을 윤곽만 보는 그는 다리까지 성치 않은 몸으로 새벽녘 소 밥 먹이고 서울행에 합류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얻은 연락처와 주소로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 닿았다. 생각보다 큰 축사 두 동. 조금 멀리 떨어진 축사 한 동은 5년 전에 후계자 선정이 된 아들 몫이다. 총 사육두수 85두. 박대길 농민 한우가 45두, 아들 축사에 한우가 41두다. 소를 입식할 자금은 부족하고 큰 축사를 놀릴 순 없어 농협 위탁소 80두까지 키운다. 올해로 한우 사육 경력은 40년째다.

“며칠 전에 소 9마리를 출하했는데 등급이 대체로 잘 나와서 7,000여 만원 받았어. 그래 연말이라 밀린 사료값 4,000만원 뚝 떼 갚았다닝께.” 홀가분한 목소리다. 하지만 아직 갚아야 사료값은 2,400만원이 남았다.

“내가 눈이 영 시원찮으니 볏짚이나 배합사료를 주기는 어렵고, 티엠알(TMR) 사료를 먹이고 있어. 사료값이 마리당 한 달에 2만원 정도 더 들어가지만, 티엠알 사료 먹이면 등급이 좋으니 크게 손해 볼 일은 없다”고.

송아지나 큰 소를 평균치로 따져보면 한 마리당 한 달에 10만원 정도의 사료값이 든다. 85두면 850만원, 1년이면 약 1억2,000만원의 사료를 구매하는 셈이다. 여기에 약값, 깔짚 등 50만원 가량 들어간다.

박대길 농민은 “한우 한 마리당 보통 2년 키우면 200만원 정도 남는데, 1, 2년 벌었던 돈 요즘엔 다 까먹지 뭐여. 김영란법 때문에 한우도 잘 안 팔린다니 소비가 줄고 덩달아 한우값이 떨어지고 있다”면서 “오늘 고산 우시장 서는 날인데, 일찍 나가봤더니만 송아지값이 마리당 30만원씩은 떨어졌다”고 푸념했다. 송아지 값이 떨어지는 만큼 큰소 값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자식들도 장성했고, 트랙터 같은 농기계 욕심도 냈었지만 아내가 적극 말린 탓에 큰 빚 갚을 걱정은 없다. 다만 15년 전 논이었던 땅을 갈고닦아 축사로 만들면서 진 빚 5,000만원은 원금과 이자를 차곡차곡 갚아나가 올해와 내년 500만원씩 1,000만원만 갚으면 자식들한테 전혀 부담지울 일이 없다고 뿌듯해했다. 일흔이 되면 짐을 덜게 된다는 설명이다.

“아들이 도시생활을 접고 5년 전에 후계자가 되면서 축사를 짓고 한우를 키워왔어. 그런데 종교적인 신념으로 지난해부터 갑작스레 해외선교 활동을 나가겠다는 겨. 몸이라도 성하면 내가 한우사육을 어찌해 볼 텐데 부부 둘이서 감당하기엔 벅차고…. 올해 안에 아들 축사를 매각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잘 안되고. 후계자를 지정했으면 먹고 사는 일에도 길을 터 줘야 하는데 이래저래 어렵네.”

축사 빚을 다 갚으면 농사도 정리해야 할지 모른다.

유난히 더운 탓에 올여름 축사관리는 어려움도 컸다. 소도 몇 마리 잃었다. 가을엔 유기농 쌀 수확이 영 신통치 않았다. 뉴스에선 대풍이라고 하지만 실제 싸래기가 많고 미질이 떨어져 이만저만 흉년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을엔 김영란법으로 한우농가들이 찬바람을 맞고 있다. 그래도 박대길 농민은 “눈이 성치 않으니, 서울서 뭔 행사가 있다고 하면 안 데리고 갈까봐 일어나자마자 소밥 주고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말하곤 웃는다. 궁금하고 불안해서 좀체 집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김영란법 때문에 국회도 몇 번 갔었어. 교육이고 어디고 ‘가자’ 소리나면 나선다닝께. 내일도 전북도청에 나갈 참이여. 나는 다행히도 허가 난 축사인데 요즘 무허가 축사 때문에 난리도 아니잖여. 누구 국회의원이 무허가 축사 양성화에 대해 입법 발의를 한다고 안 혀. 도청에 모여 힘 좀 실어주자 길래 나가야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박대길 농민의 한해가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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