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의 연말정산

  • 입력 2016.12.18 10:27
  • 수정 2016.12.18 10:56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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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앞둔 12월, 농민들은 모처럼 마음의 여유가 있다. 벼 수확이 끝나 본격적인 농한기에 접어들거나 겨울농사로, 부업거리로 구슬땀을 흘리기도 하지만 한 해의 마무리는 누구에게나 의미가 있다.

올해 농업 농촌 농민을 관통하는 핵심단어들을 나열해 보면 쌀 감산정책, LG CNS 농업생산 진출-포기, 쌀값 폭락, 고병원성 조류독감(AI), 직불제 개편 논란, 백남기 농민 영면 그리고 전봉준투쟁단 등이다. 1년이 얼추 꿰맞춰진다.

다사다난했다는 말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故 백남기 농민, 쌀값 폭락, 대기업 농업 진출 논란, AI 확산 등등 농민을 시름 짓게 만드는 소식들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쏟아졌던 2016년도였다. ‘희망고문’이란 말도 있지만 다가올 새해는 올해와 다를 수 있을까.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지난 14일 강원도 춘천시 남면의 한 들녘으로 폭설이 쏟아지고 있다.한승호 기자

사건사고와 농정 이슈들 속에서도 농민들은 어김없이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했다. 경기도 여주의 전용중 농민은 “올해처럼 백짓장 같은 해도 드물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던 터라 아무 생각이 안 난다”고 회상했다. 쌀 주산지인 만큼 쌀값에 울고 웃게 되는데, 쌀의 대표주자 격인 경기미마저 맥을 못 추니 기운이 날 리가 없다.

“12월이 조금 여유가 있는 시기다. 큰 빚은 새로운 빚내서 막고, 올해 농사지은 걸로는 소소한 것들 갚기도 바쁘다. 내년 조생종 볍씨 신청을 받고 있는데, 농협서는 내년 쌀값이 더 안 좋을 거라고 하더라.” 새해 영농 시작도 하기 전에 긴장 또 긴장이다.

철원의 경우, 논에 들어서던 하우스는 이제 더 이상 늘지 않는다. 철원 김용빈 농민은 “12월은 속으로 한숨을 삭이는 때”라고 정의했다. 1년 농사의 결실이 거둬지고 통장에 많든 적든 돈이 쌓이지만, 농협 빚과 영농자재 대출금에 고스란히 내줘야 하기 때문이다. 쌀값에서만 예년보다 20% 소득이 쪼그라들었다. 그래도 “새해를 앞두고 뭘 심어볼까, 다시 영농계획을 세워본다. 이 궁리 저 궁리… 결국 다시 올해와 같은 농사를 짓게 될게 뻔하다”고 수십년 몸에 익은 농사가 천직임을 되새긴다.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긴 강원도의 특성상 외지일 하러 나가는 경우도 겨울 일상이 됐다. 겨울벌이 한다고 산으로 나가고, 서울로 일감 찾으러 가고. 겨울 농한기는 이렇게 또 다른 일철이 되는 셈이다.

반면 제주는 12월이 농번기다. 제주 대표 농산물인 감귤 수확기도 막바지에 달하고 브로컬리, 양배추 등 월동채소 수확기도 맞물린다.

제주 조영재 농민은 “11월이면 심었을 보리를 요즘 겨울이 따뜻해서 12월에도 심는다. 다음 주에 우리집도 보리를 심을 예정이다”고 말했다. 제주 농산물은 늦가을 태풍이 휩쓸고 간 탓에 작황은 좋지 않지만 물량이 적어 시세가 괜찮은 편이다. 제주의 경우 무 수확이 1~2월경에 시작해 4월 쯤 끝나는데 올해는 육지 쪽 무 수확량이 적어 예년보다 빨리 수확하고 있는 추세다.

여성농민들은 농한기든 농번기든 일 년 내내 바쁘긴 마찬가지다. 특히 12월, 겨우내 먹을거리들을 준비하느라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종종걸음을 친다. 하지만 출근길 도시인들의 종종걸음과는 결이 다르다.

“농사지어 봐야 돈 버는 낙은 없지만 그래도 농촌살이가 좋다”고 말하는 경북 상주 김정렬씨는 “김장을 마쳐야 비로소 겨울을 느긋하게 보낼 수 있다. 거기다 메주 쑤고 무나 시래기 등 마른 나물도 거둬 저장해야 겨우내 찬거리 걱정을 던다. 한해 농사 수확한다고 통장 잔고가 쑥 오를 리 없고, 곧 빈털터리가 되지만 모처럼 여유가 있어서 좋은 때가 겨울철이다. 그렇다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고, 농사짓느라 미뤄뒀던 각종 모임, 총회 등 여기저기 참석하는 것도 꼭 요맘때”라고 설명했다.

김 씨는 “정월대보름 지나면 여자들이 문고리 잡고 운다는 옛 말을 아냐”고 물었다. 꿀맛 같은 짧은 휴식이 끝나고, 설이 지나면 또 모종농사를 시작으로 일철이 돌아오기 때문이란다.

부디 내년 이 맘 때는 “농사짓고 애들 키우고, 농촌에서 살만해”라는 말이 전국에서 들리길 희망해 본다. 20년 전만해도 전체인구의 10%를 차지했던 농민인구는 2015년 현재 257만명, 전체인구 대비 5%로 절반 까이 줄었다. 이마저도 65세 이상 고령농민들이 38%를 차지하고 있는 게 우리 농촌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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