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누에치기 ④] 뽕나무밭에서 생긴 일

  • 입력 2016.12.17 12:35
  • 수정 2016.12.17 12:4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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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우리 속담에는 그 속뜻이 가히 ‘19금’이라 할 만한 것들이 더러 있다. 「삼밭 수수밭 다 그냥 지나더니 잔디밭에 와서야 치근댄다」 같은 속담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남녀가 사랑을 나누기에는 삼밭이나 수수밭보다 뽕나무 밭이 더 맞춤하다. 울울창창하게 우거질 무렵의 뽕밭에 깊이 들면 그 사이에 동네에 불이 났는지, 일본순사가 다녀갔는지 알 바 아니다.

그래서 누에치던 시절의 농촌에서는 동네마다 고을마다 뽕나무 밭에 얽힌 야릇한 소문들이 그치질 않았다. 뽕밭에서는 오디만 여무는 게 아니라 사랑도 여물었다.

하지만, 뽕밭에서 사연이 만들어지려면 우선 분위기가 호젓해야 한다. 규모를 갖춰서 누에를 치는 집에서, 여남은 명씩 합숙을 하면서 뽕밭으로 몰려다니는 경우에는 염문이 생산되기 어렵다. 사실 당시에 잠사를 따로 갖춰놓고 대규모로 누에를 치는 집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가정집 방안에다 선반처럼 단을 만들고서 거기다 누에 상자를 층층이 포개놓고 키웠다. 누에농사 철이 되면 그 누에란 놈에게 안방도 건넌방도 다 내주고 식구들은 방 한가운데의 좁다란 통로에서 송곳 잠을 잤다. 그러다 보니 밤중에 그 버러지가 아래로 떨어져서는 자는 사람 얼굴로 기어 다니기도 했다. 누에 똥 냄새며, 잘 못 돼서 죽은 누에의 썩은 냄새가 가 코를 진동했지만, 그래도 모처럼 목돈을 만져보려면 그만한 고초는 견뎌야 했다.

1960년대 말, 상주군 낙동면 상촌리에 사는 정순단이란 처녀가 뽕따러 가는 길을 따라가 보자. 아침 일찍 일어나 안방과 건넌방을 오가며 누에에게 먹이를 주고서 뽕따러 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함께 가자고 따라나선다.

“어무이까지 뽕나무 밭에 나갈 필요 뭐 있심니꺼. 지 혼자 가서 퍼뜩 따올 거이깨네, 어무이는 집안일이나 하이소.”

어머니를 한사코 떼놓고 가는 이유가 따로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정순단이 뽕나무 밭에 혼자 들어가서 그야말로 ‘호젓하게’ 뽕을 따고 있을 때, 맞은편 고랑에서 더벅머리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임도 보고 뽕도 따려고’ 이웃마을에서 건너온 총각이다.

“뽕밭에서…기냥 둘이 이바구만 나눴는기라. 뭔 숭한 짓거리는 안 했다카이.”

그때 뽕밭에서 뭘 했느냐고 캐묻지 않았는데도 정순단씨는 두 손을 요란하게 내저어 가면서,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런데 정순단씨가 처녀 적에 뽕나무밭에서 총각을 만났던 일을 이 만큼이라도 들려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더벅머리 총각을 배필로 맞아 함께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치를 팔러 가는 날엔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누에고치의 수매가는 추곡 수매가처럼 정부 고시 가격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1등품과 3등품의 가격 차이가 상당했기 때문에 고치 공판장에서는 잠업농민들의 희비가 엇걸렸다. 정순단 처녀 네처럼 가정에서 소규모로 기르는 경우 그만큼 먹이도 자주 주고 정성을 기울여 돌보기 때문에 대부분 1등급 판정을 받았지만, 김병도 씨처럼 대규모로 사육을 하는 경우에는 그만큼 상등품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공판장에서 수매된 누에고치는 실을 뽑아내는 제사공장으로 옮겨진다. 거기서 실을 뽑아내고 남는 것이 바로 번데기다. 이 번데기를 도매업자가 공장 측으로부터 사들인 다음 소매상에게 넘기면 그들이 삶아서 행상을 하는 것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나라 양잠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잠업농가에서 적잖은 소득을 올렸으나 74년, 한국산 생사의 유일한 수입국이었던 일본의 경제가 유류파동으로 타격을 입는 바람에 수출길이 막혀버렸다. 게다가 마침 이때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모내기철과 누에치는 시기가 겹치는 바람에 일손 구하기도 힘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중국과 국교가 트이면서 값싼 중국산 고치가 밀려 들어와 사양화를 부채질 했던 것이다.

지금, 그때 그 뽕밭자리에서는, 사랑을 나누는 처녀총각의 가슴 설레는 속삭임 대신에, 노인들의 바튼 기침소리만이 간간이 새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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