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계화 투쟁의 이정표를 세우다, 홍콩 원정 투쟁
반세계화 투쟁의 이정표를 세우다, 홍콩 원정 투쟁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6.12.1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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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탁 소설가]

우리나라 민중운동이 짊어져야 하는 과제는 기나긴 세월 동안 반제(反帝)의 문제였다. 갑오년 동학투쟁부터 의병투쟁과 독립투쟁, 해방 후의 격랑과 이후에 펼쳐진 모든 운동 속에서 외세는 늘 상수였다.

양요(洋擾)로 대변되는 봉건권력의 무능과 자주적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한 내재적 요인, 냉전이라는 외인이 한반도에서 첨예하게 부딪친 전후 정세, 미 제국주의가 규정한 동북아시아 전략에서 철저한 하위 단위에 불과했던 남한의 지위 속에서 민중운동은 이중삼중의 고난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반공과 근대화라는 이중의 이념적 고난을 돌파해나가는 과정이 바로 지난한 민중운동의 가시밭길이었고 농민운동은 그 험로에서 가장 치열할 수밖에 없는 부문운동이었다. 농민운동은 이 쓰라린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운동이었고, 지금껏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지만 제국주의의 몰락이 명백한 이 시점에서 새로이 그 세계사적인 정당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2005년, 한국 농민운동이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 홍콩에서 일어난다. WTO 6차 각료회의 저지를 위한 원정투쟁에 나서면서 홍콩투쟁단은 12월 8일, 분노에 가득 찬 육성을 남긴다. 이같은 반세계화, 신자유주의 반대 언명은 전 지구적 자본에 맞선 가장 강력하고도 단호한 남한 민중의 목소리였다.

「WTO 각료회의 저지를 위한 한국민중투쟁단 여러분, 우리는 세계 민중들의 재앙인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키고 인류의 존엄과 평화, 민중의 행복한 세상을 위한 투쟁에 나섰습니다. 밑으로부터 세계화를 위한 투쟁 전선에 함께하고 세계 민중들과의 연대투쟁에 동참하신 동지들의 투쟁의지는 누구보다 높습니다.

농민들을 오랜 세월동안 농사를 지으며 생활 터전 삼아 살아왔던 땅에서 쫓아내고, 농산물을 상품화하고, 전 세계 곡물을 독점하여 이윤만을 생각하는 초국적 농기업의 음모를 깨부숩시다. (중략)

세계 민중들이 세계 자본에 맞서 투쟁합니다. 우리가 승리의 깃발을 들고 세계 민중에게 희망을 줍시다. 우리 세상은 상품이 아니다!」

2005년 12월 WTO 저지를 위해 홍콩 원정투쟁에 나선 한국 농민들이 WTO 각료회의장으로 가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고 있다.

홍콩투쟁단이 간다!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는 애초에 1,300명 정도의 원정투쟁단을 조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15일에 열린 쌀 협상 비준 반대 투쟁 중에 전용철, 홍덕표 두 농민이 경찰의 폭력에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심각한 사태에 직면하여 국내 투쟁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원정 규모는 900명가량으로 축소되었다. 그 밖에 노동계, 교육계, 문화계, 청년계 등 모두 1,500여 명의 투쟁단이 구성되었다. 가히 역사적인 투쟁이었다. 농민들이 주역이었고 모두들 투쟁 현장에서 이골이 난 싸움꾼들이었다.

원정단이 떠나기 전날인 11일,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를 위한 범국민 평화 대행진’에 참여한 홍콩투쟁단은 저녁에 평택 청소년수련원으로 옮겨 전체 교육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전농 문경식 의장은 격려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전용철 열사를 저대로 두고 홍콩에 갈 수 없어 부득이하게 함께 가지 못한다. 열사의 한을 풀기 위해 국내에 남아 책임자 처벌, 우리 농업 사수를 위해 싸우겠다. 대신 여러분들이 스스로가 우리나라 농민의 대표라는 각오로 민족 농업과 식량주권 사수, WTO 체제 해체를 위해 열심히 싸워 달라. 홍콩에서 투쟁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 우리 농업 지킴이로 앞장서서 일해 주리라 믿는다.”

다음날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6시부터 농민들을 태운 비행기가 속속 홍콩으로 날아갔다. 12월 13일 아침, 전북지역 농민들이 홍콩 현지에서 즉석으로 풍물패를 꾸렸다. 꽹과리에 맞춰 북 장단을 배웠다. 이마에 ‘NO WTO'라고 적힌 머리띠를 묶고, ‘WTO KILLS FARMERS'가 적힌 홍콩투쟁단 조끼를 입고 출정을 준비했다.

집회 장소인 빅토리아 공원 앞 거리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농민들이 버스에서 내려 빅토리아 공원으로 행진하는 동안 마주친 홍콩 시민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애써 행진 행렬에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경계심과 거리감을 두며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집회장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벌써 세계 각국의 WTO 반대 투쟁단이 와 있었다. 피부 색깔도, 언어도, 깃발도, 구호도 다양했다. 각 나라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강대국 중심의 단일한 세계무역체제를 만들려는 것이 WTO였다. 이를 반대하는 세계민중들이 빅토리아 공원에 모여 다양한 모습으로 WTO를 반대하고 있었다.

태국, 인도네시아, 브라질, 유럽을 대표하여 온 스페인, 인도 등에서 온 농민들이 발언을 하는 와중에도 수많은 기자단의 눈은 한국 원정단에 쏠려 있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한국투쟁단이 어떻게 시위를 하고 싸울 것이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한국대표단의 투쟁 선포와 비아깜페시나 집회가 끝난 오후 3시, 한국민중투쟁단 1,500명을 비롯하여 WTO를 반대하기 위해 온 전 세계 참가단이 홍콩 거리로 나섰다. 깃발과 펼침막을 앞세우고, 북과 꽹과리를 치며 “DOWN DOWN WTO”를 외치며 각료회의가 열리는 컨베션센터로 향했다.

대규모 풍물패의 등장으로 국제참가자들은 한껏 고무되었다. 세계 어느 시위 현장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게 바로 우리의 풍물이다. 컨벤션센터 부두까지 이어진 두 시간의 행진 동안 풍물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많은 홍콩 시민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국투쟁단만 막으면 별 일이 없을 거라는 지침이 홍콩 경찰에게 내려져 있었고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찰들의 신경 역시 한국투쟁단에 집중되어 있었다.

풍물패를 앞세우고 홍콩 거리를 행진하는 농민들.

자본의 음모를 분쇄하자!

행진 대오는 컨벤션센터를 가기 전에 경찰의 저지를 받았다. 그리고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분홍색 구명조끼를 입은 한국의 농민들이 부두에서 바다로 뛰어든 것이었다. 홍콩의 날씨는 약 20도, 우리로 치면 봄날이었지만 바다에 뛰어들기엔 추운 날씨였다.

그런데 무려 200여 명이 그대로 뛰어들었다. 전격적인 해상 시위였다. 컨벤션센터 앞 바다가 주홍빛으로 바뀌고 200여 명의 농민이 찬 바다에서 태극기를 들고 컨벤션센터를 향해 힘차게 수영을 하며 돌진했다. 기자들도, 국제참가가자들도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단번에 한국투쟁단의 결의를 보여준 장면은 전 세계로 타전되었다.

육지에서는 집회장에서부터 메고 온 상여를 들고 도로로 나갔고 경찰이 가로막자 상여에 불을 질렀다. 놀란 경찰들이 소화기로 불을 끄고 민주노총 참가단이 가세를 하며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바다에 뛰어들어 컨벤션센터까지 갔던 농민들이 돌아오자 홍콩에서 첫 싸움은 마무리되었다. 몸싸움 과정에서 다섯 명이 연행되고, 두 명이 다쳐 병원으로 갔다. 바다에 뛰어든 한 사람은 심장마비 증상으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정리 집회에서 비아깜페시나 나파엘 전 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농민들의 투쟁과 위대한 힘에 감동을 받았다. 한국인은 2003년 칸쿤 회의 저지를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었는데, 이제 홍콩에서도 재현되리라고 믿는다.”

홍콩 주민과 세계인을 감동시킨 장면은 15일에 벌어진 삼보일배 투쟁이었다. 빅토리아 공원에서 컨벤션센터까지 5시간에 걸친 삼보일배 투쟁은 보는 사람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언론들이 한국인의 투쟁은 과격하기로 유명하다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평화와 자기 고난인 삼보일배는 충격적이었다.

홍콩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과 지지가 이어졌다. 유인물을 들고 거리에 나가면 빵과 물을 몇 박스씩 사다주고, 식당에 가면 밥값을 대신 지불하고, 병원에선 다친 농민을 무료로 치료해 주고, 백지에 한국농민을 지지한다고 적어 거리에 나오고, 빵빵 경보기를 울려 지지를 표현하는 택시 기사, 손가락으로 V를 그리던 트럭 기사, 농민을 연행하는 경찰에게 항의하는 홍콩 시민들이 투쟁단의 힘을 북돋았다.

마치 87년 6월 항쟁을 떠올리게 하는 감동이었다. 이렇다 할 시위가 없던 홍콩에서 한국 농민들의 다양한 시위는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 지역별로 돌아가며 매일 촛불문화제를 개최했고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홍콩 시민들도 생겨났다.

6차 각료회의의 중요 분수령이 된 17일, 제 2차 국제농민공동행동의 날을 마치고 3시 경 행진에 들어갔다. 행진 한 시간여 만에 전농투쟁단이 선봉에 서서 폴리스라인을 돌파하며 컨벤션센터 진격투쟁을 시작하였다. 경찰은 최루액을 뿌리고 곤봉을 휘두르며 적극적으로 제재를 했지만 전농투쟁단은 경찰의 봉쇄를 뚫고 컨벤션센터 앞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7시 경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국제참가자들이 결합하여 본격적으로 센터 진격투쟁에 돌입하였다. 각료회의장까지 진격해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저지선을 돌파 당한 경찰도 당황했고 투쟁단 내부에서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과 회의장 밖에서 상징적인 투쟁으로 마무리하자는 주장이 엇갈렸다. 서로 토론을 하는 사이에도 전농 회원들은 곳곳에서 회의장 진격을 위한 싸움을 했고 경찰도 최루탄과 고무탄을 쏘며 적극적인 제압을 시도했다.

결국 투쟁단은 퇴각하여 도로점거투쟁으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이미 회의장에 있던 각국의 대표자들이 진격투쟁 소식을 듣고 황급하게 회의장을 빠져나간 후였다.

도로점거투쟁으로 전농은 회원 전원이 새벽에 연행되었다. 홍콩 역사상 가장 많은 연행자였고 수용시설이 턱없이 모자라 학교 강당이며 중국 국경 근처의 난민수용소까지 총동원해야 했다. 유치장 내의 집회 투쟁, 음식 거부 등으로 항거하던 연행자들은 여론을 두려워 한 홍콩 당국에 의해 거의 다 석방되었지만 14명은 지루한 재판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두 무죄가 선고됨으로서 홍콩 투쟁의 정당성이 법적으로도 입증되었다.

홍콩 투쟁은 시애틀과 칸쿤 투쟁 이후 확대되고 있던 반세계화 투쟁의 기운을 더욱 드높이고 국제적 연대전선을 확대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국제연대전선에서 한국 민중의 위상을 한껏 높인 일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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