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녹두죽을 먹으며

  • 입력 2016.12.11 11:23
  • 수정 2016.12.11 11:32
  • 기자명 심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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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웬수같은 딸이 뭐가 이쁘다고 엄마는 잠깐 누워있는 나를 위해 녹두죽을 끓여 주신다. “한 입 먹고 약 먹고 자라고.”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러냐며 조금 있다 밥 먹을 거라 해도 “그냥 먹어 이년아”하시며 나만 보면 투덜투덜 잔소리를 늘어놓으시지만 자식 아픈 건 못 보겠나보다. 엄마가 아프시다하면 그저 “병원에 가봐. 내가 뭐 의사야?”하며 아프다는 소리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못된 딸인데.

행여나 녹두꽃 그냥 떨어질까 싶어 새들 지켜가며 벌레 잡아가며 가족이 먹을 만큼 해마다 심는 녹두. 그 녹두가 오늘은 죽이 되어 내 눈 앞에 놓여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 120년 전의 녹두장군이 2016년 12월 우금치를 넘어 국회로 입성한다는데 이렇게 한가롭게 누워있을 수야 없지 녹두죽 한 그릇을 사발 째 들고 퍼먹는다. 병 따위는 이제 어림없다.

지난주엔 여성농민으로만 구성돼 있는 영농조합법인을 농업경영체로 등록하기 위해 인근 군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 몇 해 전에 인근 시군과 합병돼 우리 지역엔 해당 사무소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든 법인 회원들이 농민이라서 농업경영체 등록 또한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농민이 아니라 각자 경영체로 등록돼 있어야 경영체 등록을 할 수 있단다. 회원 중 한 분이 경영체 등록이 돼있지 않았는데 농지원부의 해당 농지관할 이장으로부터 농업인 확인서를 떼 와야 한다고 했다. 다음날 서류를 준비해 갔더니 심고자하는 또는 수확하고자하는 작물을 심어놓은 상태에서 경영체 등록을 하는 것이라고 콩은 이미 수확을 해버렸으니 판매 확인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농업인확인서는 농업경영체 등록이 완료된 사람만 발급되고 오로지 품질관리원에서만 그 서류를 발급합니다”라고 완곡하게 이야기했다.

평생 농민으로 살면서도 땅 없는 농민들은 자신이 농부임을 증명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일단 법적농민이 되는 길은 내년 봄에나 가능하기에 다른 법인 회원으로 변경해서 접수는 완료했지만 처리 기간이 30~90일이라니 이제 기다려 봐야하겠지….

여성농민! 평생 농민으로 농업은 물론이요, 가사노동을 전담하며 농촌공동체를 유지하며 살고 있지만 그 역할만큼 사회적 지위는 물론 법적지위도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현실이다. 경영체 등록을 한다고 해서 당장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왜 뭔가에 또 얽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여성농민들이 태반이다. 농촌아녀자, 농가주부라고 불리다 여성농민이라는 단어가 이 세상이 등장하게 된 게 불과 3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여전히 농가주부나 부녀자로 불리는 게 자연스럽게 생각되는 여성농민들이 스스로 여성농민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여성농민의 법적·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나서게 된다면 아마 우리 농촌사회 전반은 혁명적으로 변하게 되지 않을까. “내년에도 농사지을 수 있을까?” 그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내년에도 당당하게 농사짓자는 마음가짐 하나하나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힘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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