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은 움직였다

  • 입력 2016.12.04 20:53
  • 수정 2016.12.04 20:54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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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수확이 끝나, 이제는 황량하기까지 한 논을 가로질러서라도 트랙터는 기어이 가고자 했다. 인도와 도로를 구분하는 얕은 턱은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경찰은 온갖 술수를 써가며 막았다. 처음엔 행진은 안 된다. 그 다음엔 트럭에 단 깃발을 묶어라. 다시 그 다음엔 적재함에 실린 나락, 볏짚을 내려놓기 전엔 안 된다. 결국엔, 트랙터는 절대 안 된다. 트랙터(를 실은 트럭)만 돌려 세우면 농민들이 몰고 온 화물차는 고속도로 진입을 허용하겠다. 말을 자꾸 바꿨다.

‘박근혜 퇴진’ 이 구호 하나로 전국에 들불을 놓으며 올라온 트랙터였다. 전남 해남, 경남 진주에서 열흘 넘게 20km, 30km의 속도로 국도를 넘나들며 질주해 온 농민들이었다. 때로는 수십여 대의 트랙터가 함께 대열을 이루며 행진하는 장관을 선보이기도 했다. 면 소재지 혹은 도심을 통과할 때마다 시민들의 환호와 응원이 행진대열에 쏟아졌다. 트랙터에 기름을 넣어주고 먹을거리를 챙겨주는 시민들의 손길도 덩달아 이어졌다.

비선실세 국정농단 박근혜 실정에 지친 민심의 향방이 어디로 향해있는지 절절하게 목도한 농민들은 트랙터를 놓고서라도 상경하려 했다. 그러나 경찰은 경부고속도로 양재IC 부근에서 농민들의 행진을 다시 막았다. 자진해산을 종용하면서도 한 쪽에선 강제연행, 강제견인이 이어졌다. 이럴 바엔 다 잡아가라, 농민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몸싸움이 번졌고 이 과정에서 경찰이 휘두른 채증카메라에 농민의 대표가 머리에 피를 흘리는 부상까지 입었다. 실신해 응급차에 실려 간 농민들도 있었다.

변하지 않은 국가의 폭력 앞에 농민들은 차디찬 겨울 아스팔트 한복판에서 밤샘 노숙농성을 벌였다. 농성 소식을 알게 된 시민들은 핫팩과 담요, 생필품, 다양한 먹을거리 등을 지원하며 농민들의 투쟁을 응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국농민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던 서울 세종로공원에 모인 농민들은 지난 보름 가까이 ‘전봉준투쟁단’에 보여 준 국민들의 성원에 거듭 감사인사를 전했다. 더불어 저항의 상징인 트랙터를 끌고 광화문까지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고개 숙였다. 농민들은 그러나 “전봉준투쟁단은 막히면 뚫을 것이고, 잡혀가면 또 다른 전봉준이 나설 것이다. 농민 손으로 박근혜 정권을 끌어내리고 나라다운 나라를 반드시 세울 것”이라고 재차 결의를 밝혔다.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도 경찰의 폭력적인 집회 방해를 규탄하며 밤샘 농성을 벌였던 농민들 모습 뒤로 한 문장의 글귀가 보였다.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또 다른 전봉준, 농민들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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