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 농민의 죽음

  • 입력 2016.11.27 20:20
  • 수정 2016.11.27 20:25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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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최용탁 소설가]

농민들에게 쌀은 언제나 삶의 원천이자 기쁨이었다. 쌀농사에 맞추어 한 평생을 살다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쌀은 기쁨도, 식량주권을 지킨다는 자부심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오히려 땅에서 내몰고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죽음을 강요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쌀이 농민을 사지로 내모는 기막힌 상황, 그 정점에 2005년이 있었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작년 11월 14일에서 꼭 10년을 거슬러 올라간 2005년 11월 15일, 두 사람의 농민이 경찰이 휘두른 폭력에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2004년 9월 10일 전북 정읍시청 앞에서 열린 `식량주권 수호 농민대회’에 모인 농민들.

2005년은 수매제도 폐지와 농지법 개악으로 반농민적 농업구조조정정책이 심화되었고 쌀개방 협상이 마무리되어 국회비준까지 완료된 해였다. 농민들에게 사활이 걸린 중대한 시기였던 만큼 투쟁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집회와 시위에 대해 유화적이었던 노무현 정권의 농민 투쟁에 대한 탄압은 가혹한 것이었다. 농민들의 세를 확실하게 꺾어버리겠다는 정권의 의도는 이미 전 해에 일어났던 정읍의 농민 투쟁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2004년 9월 10일, 정읍시청 앞에서 열린 ‘식량주권 수호 농민대회’에 참가한 3,000여 명의 농민들은 경찰들의 야수적인 폭력 앞에 맞닥뜨렸다. 연로한 농민들에게 경찰은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고 거리는 광주항쟁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시가전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농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수많은 농민들이 연행되었다. 실명 등의 심각한 부상자가 50여 명이 발생할 정도로 이 날의 분위기는 살벌하였다. 쌀 협상을 앞두고 벌인 의도적인 폭력이었다.

쌀 국회비준 저지 11.15 농민대회

2005년 11월 11일, 농업인의 날이었던 그 날에 담양의 정용품 농민이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유서에서 그는 노무현 정권의 쌀 개방을 반대하며 ‘정부는 쌀 문제 등 농업 문제를 농촌 현실에 맞게 세우라’고 요구하며 농민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썼다. 38세의 젊은 농부였던 그는 마을 이장과 농협 이사로 일하며 한농연 활동을 했던 부지런하고 건실한 농민이었다. 누구보다 영농에 열심이었고 적극적이었던 그조차 쌀농사가 무너지는 현실 앞에서 절망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사흘 뒤, 성주에서 오추옥 농민이 역시 농약을 마시고 자결한다. 다음날 열린 ‘쌀 국회비준 저지 11.15 전국농민대회’를 하루 앞두고였다. 오씨는 누구보다도 농업의 소중함을 알고 우리 농업을 사랑한 농민이었으며, 농촌의 현실을 바꾸고 농촌에 새로운 희망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던 성주군 여성농민회 활동가였다.

4년 전 귀농한 오추옥 활동가는 그간 쌀 농사를 비롯해 참외, 방울토마토 농사 등 농업으로 생계를 꾸려보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농민회에서 문화부장을 맡으며 농업 회생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정도로 깨어있는 농민이었지만, 열심히 일해도 매해 빚만 늘어가는 절망적인 현실에 좌절하고 만 것이다.

연이은 농민의 음독으로 격앙된 분위기는 전국농민대회에서 분노로 폭발하였다. 이미 6월과 10월에 두 차례에 걸쳐 농민총파업을 진행한 농민들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었다.

전농과 한농연 등 ‘쌀협상 국회비준 저지 비상대책위원회’는 오후 1시부터 여의도 문화공원에서 사전집회를 시작했다. 이미 5,000여 명의 농민들이 집결하였고 전국에서 속속 대오가 들어오고 있었다. 경찰은 여의도 문화공원 입구 곳곳에 전경들을 배치, 행사장에 들어오는 농민들을 검문했다.

행사장 출입 자체를 막지는 않았지만 문화공원 입구 곳곳에서는 전경과 농민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잔뜩 긴장되었다. 격앙된 농민들이 경찰과 충돌하여 행사 시작 전에 이미 두 명의 농민이 부상당해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농민들은 전국 각지에서 관광버스 차량을 이용해 올라오고 있었고 행사 무대 앞에 농업정책을 비판하며 음독자살한 고 정용품씨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행사장에 도착한 농민들은 향을 피우거나 술을 따랐고 몇몇 농민은 빈소 앞에서 묵념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전날 음독한 성주의 오추옥씨는 소생 가능성이 없는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오후 1시 30분부터 ‘고 정용품 추모·쌀 협상 국회비준 저지 전국농민대회’ 사전대회가 주한미군을 규탄하는 함성으로 시작됐다. 김지태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수십 년간 땀 흘려 가꿔온 농토를 주한미군이 빼앗으려 하지만 우리 평택 농민들은 목숨 걸고 싸워 단 한 평의 땅도 내주지 않을 것”이라며 관심을 호소했다.

이어 국제적 소농조직인 비아 캄페시나 소속인 인도네시아 농민활동가 테도 프라보노는 “WTO협상 체결 후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개방의 실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전대회에 이어 오후 2시부터 본대회 1부인 ‘고 정용품 동지 추모식’이 열렸고 만여 명으로 불어난 농민들은 끊임없이 ‘쌀 협상 국회비준 저지’를 피를 토하듯 외쳤다. 오후 3시 30분, 농민들은 국회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고 정용품씨의 영정 사진과 ‘열사정신 계승하자’ 등의 구호가 적힌 만장 수십 개를 앞세우고 국회 방향으로 행진하는 농민들을 막기 위해 경찰은 수십 대의 차량을 동원해 국회로 향하는 모든 도로를 막았고 국회 정문 앞에는 농민들의 진입을 막기 위한 차벽이 쳐 있었다. 눈에 핏발이 선 농민 200여명 역시 쇠파이프와 나무몽둥이를 들고 싸움을 준비하고 있어 일촉즉발이었다.

문경식 전농 의장은 “노무현 정부가 농민의 소망을 배신했다. 국회 비준안을 이대로 통과시킨다면 전국 곳곳의 야적장에 있는 모든 쌀을 불사르겠다”고 경고했다.

2005년 12월 31일 서울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서 거행된 고 전용철·홍덕표 열사의 영결식.

고 전용철·홍덕표 열사의 죽음

오후 5시, 여의도 국회 앞 왕복 8차선 도로는 농민과 경찰이 충돌하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국회로 진출하려는 농민들은 곳곳에서 돌과 소주병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진출로 확보에 나섰다. 이에 맞서 경찰도 방패를 휘둘러 부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경찰들이 휘두르는 방패는 치명적인 무기였다. 뒷목이나 머리를 가격당한 농민들이 도로 곳곳에서 쓰러진 채 피를 흘렸다. 그 날 기자들의 카메라에 잡힌 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흥분한 농민들은 여의도 포스코회관 앞에서 국회 진입로를 가로막고 선 전경버스 2대에 불을 질렀다. 인근에 있던 LPG 가스통을 전경버스 쪽으로 가져와 타이어 부근에 틀어놓고 불을 지른 것이었다. 경찰들도 물대포와 소화용 분말가루 등의 살포와 함께 무차별적으로 방패를 휘둘렀다. 경찰들은 “모두 죽여버려” 같은 믿기 어려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APEC정상회담을 앞두고 했던 테러진압훈련을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가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오후 6시경까지 경찰과 산발적인 충돌을 계속하던 농민들은 여의도 문화공원 행사장으로 재집결하려 했으나 불시에 기습해 온 경찰들에 의해 공원에서도 밀려났다. 농민들과 여의도공원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경찰은 결국 공원 안으로 들어가 행사장과 무대를 점령했다.

100명 가까운 농민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후송됐고, 해가 지면서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져 집회를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지만 농민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7대의 경찰 차량이 전소되거나 일부 불에 탔고 여의도에는 깨진 병과 보도블록이 나뒹굴었다. 집회를 주관한 전농조차도 그 정도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농민들의 분노가 컸던 것이다.

경찰이 휘두르고 찍어댄 방패에 부상을 당한 농민들이 500여 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농민들이 있었다. 충남 보령의 농민 전용철과 전북 김제의 농민 홍덕표였다. 방패에 찍히고 무차별 구타를 당한 두 농민은 결국 농민대회 후 10일, 33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11월에만 네 명의 농민이 목숨을 잃은 참극이 발생한 것이었다. 농민을 때려죽이고 평택 대추리에서 농민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른 노무현 정권은 적어도 농민들에게는 ‘악마의 정권’이었다.

그 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전용철, 홍덕표 열사의 영결식이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서 시작됐다. 영결식에는 2,000여 명의 인파가 몰렸고 전농 문경식 의장은 “농업회생 식량주권을 위해 한 점 불꽃으로 산화해간 고 전용철 홍덕표 농민의 안타까운 죽음에 통절의 눈물로 애도를 표한다” 고 열사를 추모했다.

전용철 열사의 친형인 전용식 씨는 “이제는 이런 일이 더 이상 없어야한다. 쌀을 죽이고 사람을 죽였다. 사람은 살리지 못하지만 쌀은 여러분이 있는 한 살릴 수 있다. 정부는 우리의 목소리를 짐승의 소리가 아닌 사람의 소리로 좀 들어달라”고 말해 모두를 숙연하게 했다.

쌀을 지키기 위해 농민들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는 오늘의 백남기 열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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