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백남기 어르신, 편히 영면하소서

5일 광화문 영결식 … 5만여명 애도 물결
6일 보성·광주 노제 후 5·18 구묘역 안장
유족 "함께 해주신 덕분에 그 시간 이겨내”

  • 입력 2016.11.13 10:56
  • 수정 2016.11.13 10:58
  • 기자명 김은경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김은경 기자]

고 백남기 농민이 지난 6일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영원히 잠들었다. 세상을 떠난 지 42일 만에 치러진 장례다. 수많은 추모행렬이 광주 금남로에서부터 장지까지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박근혜 정권 퇴진을 외쳤다.

이에 앞서 고 백남기농민 장례위원회는 지난 5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에서 천주교 수도사들과 유족들의 발인 이후 9시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가졌다. 이후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종로구청 앞 사거리에서 노제를 치르고 광화문광장에서 5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민주시민사회장으로 영결식을 진행했다. 이날 저녁 10시께 고인의 운구는 고향인 전남 보성으로 돌아갔다. 새벽밥을 지어먹고 집을 떠난 지 358일만이다.

고인은 1947년 전남 보성군 웅치면에서 태어나 지난 1980년 중앙대 총학생회 부회장을 지내며 박정희 유신 잔당 장례식을 주도,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같은 해 5월 17일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계엄군에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3.1절 특사로 풀려나기 전까지 6개월여 수형생활을 했다. 이후 고향인 보성으로 내려와 농민의 길을 걸으며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했다.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때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 약속했던 ‘쌀값 21만원 보장 공약’을 지키라고 참가했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후 317일간 사경을 헤매다 지난 9월 25일 사망했다.

백씨 유족과 보성군농민회는 6일 오전 보성군 웅치면 부춘리에 주검을 운구해 마을사람들과 함께 생가와 밀밭을 둘러본 뒤 보성역에서 노제를 지냈다. 낮 12시께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에서 광주시민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제가 열렸다. 고인의 딸 백민주화씨는 “마지막 길 함께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며 “함께 해주신 많은 분들 덕분에 그 시간 다 이겨냈고, 부검이라는 끔찍한 현실에서 아버지를 구해내고 결국 고향에 돌아오실 수 있게 됐다”며 허리 굽혀 인사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인 김명섭 신부는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책임자가 처벌될 때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백남기 농민이 되어 불의한 세력에 끝까지 항거하며 싸워야하겠다”고 말했다.

백남기전남투쟁본부는 ‘백남기여 부활하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통해 “백남기는 서서 싸우고 누워서 싸우고 죽어서도 싸운다”며 “순진하게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지 말자 싸우고 깨지자 백남기처럼”을 다짐했다. 노제를 마친 뒤 금남로에서 서방시장까지 운구 행렬이 이어졌다. 광주시민 3,000여 명이 추모물결을 이루었다. 오후 5시께 화장한 고인의 유골은 민족민주열사들이 잠든 5·18구묘역에 안장됐다. 이곳엔 이한열과 강경대 열사, 김남주 시인 등 46명의 민족민주열사 유해가 잠들어 있다. 이날 하관식이 끝난 6시가 넘은 후에도 추모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