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계화 투쟁의 중심에 서다, 멕시코 칸쿤 투쟁

  • 입력 2016.11.11 16:09
  • 수정 2017.09.01 18:0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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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최용탁 소설가]

“우리의 모든 가치를 시장가치로 전환하려는 WTO 칸쿤회의를 저지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농민과 민중을 죽이려는 세계무역기구와 초국적자본의 대리인 구실을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항의의 뜻을 밝히고 전 세계 민중과 연대하기 위해 우리가 멕시코로 가는 것이다.”

2003년 9월 1일, 전국민중연대와 ‘자유무역협정ㆍWTO반대 국민행동’은 오전 11시에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칸쿤 현지투쟁단 발족 기자회견을 가졌다.

멕시코 칸쿤에서는 소위 WTO 제 5차 각료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각료회의에서는 2001년 4차 각료회의부터 시작된 도하개발의제(DDA)에 따른 새로운 무역체제 출범을 위한 여러 협상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는 수출보조금과 국내보조(추곡수매제 등)의 감축 등을 목표로 하는 농업협정으로, 이는 대규모 농업자본과 경쟁하는 제3세계 농업의 몰락을 불러올 것이었다. 공공서비스의 사유화를 주 내용으로 하는 서비스협정은 교육, 보건의료, 에너지, 상수도, 통신 등을 협상대상으로 삼았다. 세 번째, 특허에 의한 배타적 권리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지적재산권협정은 식품, 의약품, 종자, 전통적 지식 등에 대한 민중의 접근권 박탈이 우려되는 협정이었다.

더욱이 전 세계적 투자와 금융거래의 자유화를 내용으로 하는 ‘투자자유화협정’의 체결 시도는 심각한 문제였다. 투자자유화협정이 단기차익을 찾아 떠도는 초국적 투기자본의 투전판으로 세계경제를 전락시킬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멕시코 칸쿤에서 WTO 반대 시위에 나선 이경해 열사의 모습.

칸쿤 그리고 이경해

9월 3일 선발대의 출발을 시작으로 칸쿤에 도착한 한국 농민 대표는 150여 명이었다. 한국투쟁단의 행로는 시작부터 애로와 난관이 그치지 않았다. 여행사에서부터 일이 꼬여 비행기를 여러 대오로 나누어 타야만 했다.

유카탄 반도의 북동쪽 해안 도시인 칸쿤은 천혜의 관광지로 이름 높은 곳이었지만 투쟁단에게는 풍광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정광훈 단장은 도착하자마자 먼저 각료회의가 열리는 컨벤션센터로 향했다. 세계를 움직이는 리모컨을 든 자들이 모이는 자리인지라 역시 물샐 틈 없는 철통같은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싸움꾼들만 왔는데 무언가 강력한 타격을 주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었다.

하지만 좀처럼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우선, 회의가 열리고 대표단들이 주로 체류하게 될 호텔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해변가 자체가 출입이 어려운 자연 방어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해변가는 중간에 폭이 10㎞나 되는 호수를 사이에 두고 총 16㎞ 길이의 긴 직사각형 모양의 섬으로 돼있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지 않는 한 컨벤션센터로 접근을 할 수 없었다. 배가 없으니 헤엄을 쳐서 건너갈 생각도 해보았지만 호수에는 악어떼가 우글거린다고 했다.

투쟁 일정은 여유 하나 없이 빽빽했다. 오늘은 환경토론, 내일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농업분야 행사 등 장소 찾기도 힘들고, 같은 지명의 장소, 극장, 호텔 등이 있어서 찾아다니다가 거의 시간을 보낸 일도 많았다. 각국에서 온 1만5,000여 명의 농민과 반세계화 활동가들이 모이는 주 무대는 ‘킬로미터 제로’라고 불렸다. 컨벤션센터로 이어지는 100여 개가 넘는 호텔이 시작되는 지점이었고 분수대 로터리가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컨벤션센터로의 진압을 막기 위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사슴목장을 둘러서 막는다는 견고한 철조망이었다.

9월 10일은 각료회의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날이자 ‘세계농민 공동행동의 날’이었다. 오전 11시, 150여 명의 한국 농민대표는 비행기에 싣고 온 상여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다. 상복을 입은 사람, 두건을 쓴 사람, 피켓을 든 사람, 머리띠를 맨 사람, 메가폰을 든 사람, 꽹과리며 북을 치는 사람, 각기 다른 말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플래카드와 상여를 앞세우고 ‘킬로미터 제로’ 분수대 로터리로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찌는 듯이 무더운 날씨에 긴 행진이었다. 알 수 없는 각국, 원주민들의 구호 사이로 우리나라 농민들의 ‘다운다운 더블유티오’의 힘찬 구호도 메가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두 시간 가량의 행진 끝에 바리케이드 앞에 이르렀다. 분노한 사람들이 철조망에 매달려 밀어보고 당겨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철조망 너머에는 경찰들이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시위대는 철조망을 타고 올라가 구호를 외쳤다.

철망 위에 올라선 농민 중에 이경해가 있었다. 그는 가슴에 ‘WTO kills farmers'라고 쓰인 노란 걸개를 입고 있었다. 그가 무어라고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여러 소리에 묻혀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슴에 적혀 있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가 무언가로 가슴을 치는 것 같은 동작을 하더니 순식간에 높은 철망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가슴을 찌른 것은 등산을 전문적으로 했던 이경해가 가지고 다니던 아미나이프였다. 13년 전에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장에서 할복을 시도했던 바로 그 칼이었다. 수많은 군중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알 수없는 비명과 언어가 터져 나왔다. 즉시 로드리게스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지만 이경해는 두 시간 만에 숨지고 말았다. 한국 시간으로 추석날, 현지 시간으로 10일 오후 3시 30분이었다.

멕시코 경찰에 맞서 투쟁중인 전 세계의 농민들.

각료회의를 무산시키다

이경해는 전북 장수 사람으로 대학졸업 후 5만여 평의 험한 산지를 개간해 농장을 만들고 고랭지 채소와 젖소를 기르며 영농에 힘썼다. 50여 농가들도 높은 수익을 올리는 그를 따라 낙농에 나섰고 장수군은 대대적인 목축 붐마저 일었다. 그 후 이 땅의 농업과 농민을 위한 길에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투쟁해왔다. 전국농업인후계자협회장, 초대 한국농업경영인협회장을 맡았고 한국농어민신문을 창간하기도 했으며, 중앙연수원 교수, 전라북도 도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농민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농민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농민운동가의 길이되 전농과는 다소 다른 길을 선택한 이였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90년 제네바에서 열린 자해사건이었다. 1990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TO 본부 로비에서 칼로 할복을 시도했던 것이다. 한국 농업의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WTO 사무총장을 만나고 나오다 농산물 수입개방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칼을 꺼낸 것이었는데 당시는 우루과이 협상에 반대하는 온 국민의 함성이 높았던 시기였다. 스위스에서 있었던 그의 자해사건은 농업 문제를 일깨우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고 43조원의 정부예산이 농어촌 구조 개선사업에 들어가는데 일조를 했다.

이경해의 죽음은 순식간에 각국의 농민들을 하나로 묶고 투쟁력을 고취시키는 힘이 되었다. ‘킬로미터 제로’ 분수대에는 이경해의 영정 사진과 촛불이 켜진 헌화 상이 차려졌다. 길바닥에는 수많은 촛불이 켜지고 철망에는 하얀 국화꽃들이 꽂혔다. 매일 밤, 그리고 하루 종일 추모집회가 계속되었다.

13일은 반세계화 행동의 날이었다. 이 날만은 끝장을 보자는 열기가 사람들의 눈에서 일렁였다. 누가 구해왔는지 팔뚝만큼 굵은 밧줄이 등장했다. 철망을 자를 절단기도 나타났다. 수염을 기른 전농 부의장 강기갑이 땡볕 속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밧줄을 묶을 구멍을 잘라내고 그 굵고 단단한 밧줄을 동여매었다. 세 가닥 줄을 줄다리기 할 때처럼 길게 늘어놓고 모두 그 줄에 달라붙었다.

민중의 힘이 너무 세서인지 풀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다가 결국은 그 단단한 철망 구조물 앵글들을 뚫고 말았다. 줄다리기가 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마냥 너무 재미있어하며 환호를 했다. 힘쓰는 구호도 한국식으로 ‘으샤으샤’ 였다.

사람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허물어진 양쪽 철 구조물들을 뜯어내기 시작하고 아직 뜯기지 않은 양 옆 철망에 미국 허수아비를 묶고 불을 질렀다. 투쟁단장 정광훈은 오른쪽에 걸려있던 성조기를 끌어내려 불을 붙였다. 왼쪽에 있던 성조기는 전농 정현찬의장이 불태웠다.

그날 어떻게 들어갔는지 한국투쟁단 타격조들은 그 삼엄한 컨벤션센터를 기어이 뚫고 들어가 기습시위를 벌였다. ‘WTO가 민중을 죽인다’ 는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치다가 경비대들에게 연행되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각료회의가 무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메가폰을 든 한 여성이 ‘세계 민중의 힘으로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켰다’ 고 흥분한 목소리로 외쳐댔다. 그 소식에 분수대 캠프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이경해 열사 영정 앞에서 춤을 추었다. 분수대를 돌면서 반세계화투쟁에 온 각기 다른 나라와 지역의 사람들이 어울어져 춤을 추는 광경은 감동적이었다. 한국의 꽹과리와 징소리가 칸쿤의 하늘에 울려퍼졌다.

분수대 물속으로 뛰어들어 옷이 젖은 채 돌아다니며 투쟁 승리의 기쁨을 만방에 알리는 축제를 벌였다. 한국 데모단의 투쟁은 제3세계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수출되어 한국을 알리었다. 모든 나라 민중들이 ‘꼬레아! 꼬레아!’를 외쳤다. 컨벤션센터에 있던 세계 모든 기자들이 우리 캠프로 몰려왔다. 자랑스럽게 최초의 원정 투쟁을 성공시킨 투쟁단은 기쁨도 잠시, 비행기 냉동칸에 이경해의 시신을 싣고 돌아왔다.

반세계화 투쟁의 여정은 아직 멀고도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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