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317일간 사경을 헤매다 사망한 고 백남기 농민이 6일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영원히 잠들었다. 세상을 떠난 지 42일만에 치러진 고인의 장례식은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슬픔에 잠긴 수많은 추모행렬이 광주 금남로에서부터 장지까지 고인의 마지막길을 함께 배웅했다.
백씨 유족과 보성군농민회는 6일 오전 보성군 웅치면 부춘리에 주검을 운구해 마을사람들과 함께 노제를 지냈다. 이어 보성역에서 열린 노제에서는 고인의 지인과 시민사회 관계자 등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사 낭독, 헌화·분향, 추모 살풀이 공연 등이 진행됐다. 안규갑 웅치면민회장은 “농민대통령 고 백남기님의 영전에”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낭독하며 “아직도 나는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먼 길을 홀연히 떠나심을 믿지 못하고 당신의 잔잔한 미소를 띠면서 ‘안형’ 하고 부르면서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환상을 느낀다“며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항상 강자에 맞서 약자를 배려했던 내 고향의 큰 어른이었다”고 고인의 삶을 추모했다.
고인은 1947년 전남 보성군 웅치면에서 태어나 지난 1980년 5월 8일 당시 중앙대 총학생회 부회장으로 지내며 박정희 유신 잔당(전두환. 노태우) 장례식을 주도, 5월 15일에는 중앙 4000인 한강도하를 이끌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같은 해 5월 17일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계엄군에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3월 3.1절 특사로 풀려나기 전까지 6개월여 수형생활을 했다. 이후 고향인 보성으로 내려와 농민의 길을 걸으며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했다.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때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 약속했던 ‘쌀값 21만원 보장 공약’을 지키라고 참가했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고인은 317일간 사경을 헤매다 지난 9월 25일 사망했다.
고인의 운구는 낮 12시께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에 도착했으며, 광주시민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제가 열렸다. 이날 고인의 둘째딸 백민주화씨는 “이렇게 많은 분들께서 마지막길, 마지막 날 함께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며 “작년 11월 14일 아버지가 경찰 물대포에 맞고 317일 만에 단 한 번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가족들은 그 317일 기간 동안 그 이후에도 사실 마음껏 슬퍼한 적이 없었다. 슬퍼하는 와중에도 걱정해야 했고 불안에 떨어야 했고 무서워야 했고 분노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저희 가족 곁에 함께 해주신 많은 분들 덕분에 그 시간 다 이겨냈고, 부검이라는 끔찍한 현실에서 아버지를 구해내고 결국 아버지께서 고향에 돌아오실 수 있게 됐다. 정말 감사드린다”라며 허리 굽혀 인사드린 후 눈물을 닦았다.
문경식 고 백남기 농민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상임위원장은 “당신이 못 다 이룬 꿈 만들어 가겠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미래는 당신이 염원하던 생명과 평화와 따뜻하게 존경받는 이 세상이 될 것”이라며 “120년 전 녹두장군과 농민들이 꿈꿔왔던 노동자 민중들이 진정한 주인 되는 세상 될 것이다. 하늘에서 지켜봐달라”라며 고인의 영면을 빌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인 김명섭 신부는 “고인이 걸어오신 삶은 생명의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과 너무 닮아 있다”며 젊은 시절 독재 정권에 항거하고 고향에 돌아와선 평생 농부로서 생명을 보듬고 살았던 숭고한 삶의 여정과 죽음의 여정을 기렸다. 또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철저한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책임자가 처벌될 때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백남기 농민이 되어 불의한 세력에 끝까지 항거하며 싸워야하겠다”고 말했다.
참가 시민들은 ‘박근혜 퇴진’이라고 적힌 손 피켓과 함께 인자한 미소를 짓는 백남기 농민의 초상화를 들고 “박근혜를 몰아내고 민중세상을 건설하자”며 구호를 외쳤다. 이어 바리톤 정찬경씨는 고인이 평소 좋아했던 민중가요 ‘직녀에게’를 애절한 목소리에 담아 “슬픔은 끝나야 한다”며 억울한 죽음을 위로했다.
임추섭 백남기농민 광주투쟁본부 상임공동대표는 “고인이 쓰러져 병원에 누워계시는 동안에 고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됐다. 민주화투쟁에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언제 한번 당신이 그런 사실을 직접 얘기하지도 않았다”며 “꽹과리를 들고 활짝 웃고 있는 고인의 모습에서 성품을 알 수 있듯이 따뜻한 할아버지, 생명과 평화의 일꾼을 무지막지한 박 정권이 물대포를 앞세워 학살했다는 걸 결코 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반인륜적 반민주적 작태를 낱낱이 파헤쳐 물어야 한다”며 “당신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고인의 넋과 혼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고 추모했다.
이날 먼 길을 달려온 히다얏 그린필드 IUF 국제식품연맹 아태지역위원회 사무총장은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며 “저희 가맹조직 조합원(127개국 1200만명)들은 백 선생을 죽인 살인정권에 대해 분노하고 함께 격분하고 있다. IUF에서는 25개국의 언어로 백 농민의 타살에 대해서 조합원들과 함께 공유했으며, 여러분들의 목소리와 투쟁을 전 세계적으로 실어 나르겠다. 국제적으로 이 문제를 확대해서 한국 정부를 압박해나갈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이어 광주전남교육문화원 솟터 놀이패 신명 소속 오숙현 선생의 씻김굿이 이어졌으며, 광주지역 노래패는 민중가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참가시민들과 함께 불렀다. 백남기전남투쟁본부는 ‘백남기여 부활하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낭독하며 “백남기는 서서 싸우고 누워서 싸우고 죽어서도 싸운다”며 “순진하게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지 말자 싸우고 깨지자 백남기처럼”을 다짐했다.
노제를 마친 뒤 금남로에서 대인시장, 광주고 앞, 서방시장까지 3km가량 운구 행렬이 이어졌다. 고인을 죽인 살인정권 ‘박근혜 퇴진’이 적힌 깃발을 맨 앞에 세운 추모행렬은 뒤이어 ‘생명평화일꾼 백남기’ 농민의 붉은 명정을 세우며 운구행렬이 뒤를 따랐다. 이어 ‘국가폭력 끝장내자’ ‘책임자를 처벌하라’ ‘특검을 실시하라’고 적힌 50여개의 만장행렬 뒤로 광주시민 2천여명이 추모물결을 이루며 “살인정권 퇴진하라”는 외침이 금남로에 울려 퍼졌다. 고인의 장례행렬이 지나가자 시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인도로 나와 삼삼오오 눈시울을 붉히고, 가던 길을 멈춰 터져 나오는 슬픔을 삼키는 시민들도 곳곳에 있었다.
오후 3시께 광주시 영락공원 승화원에서 고인의 시신을 화장했다. 빈소에서는 가족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천주교에서 위령기도라고 부르는 연도를 진행 후 고인의 영면을 빌었다. 오후 5시께 한줌의 재가 된 고인의 유골은 민족민주열사들이 잠든 5‧18구묘역에 안장 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이곳엔 이한열과 강경대 열사, 김남주 시인 등 46명의 민족민주열사 유해가 함께 잠들어 있다.
백씨 유족과 보성군농민회는 6일 오전 보성군 웅치면 부춘리에 주검을 운구해 마을사람들과 함께 노제를 지냈다. 이어 보성역에서 열린 노제에서는 고인의 지인과 시민사회 관계자 등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사 낭독, 헌화·분향, 추모 살풀이 공연 등이 진행됐다. 안규갑 웅치면민회장은 “농민대통령 고 백남기님의 영전에”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낭독하며 “아직도 나는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먼 길을 홀연히 떠나심을 믿지 못하고 당신의 잔잔한 미소를 띠면서 ‘안형’ 하고 부르면서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환상을 느낀다“며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항상 강자에 맞서 약자를 배려했던 내 고향의 큰 어른이었다”고 고인의 삶을 추모했다.
고인은 1947년 전남 보성군 웅치면에서 태어나 지난 1980년 5월 8일 당시 중앙대 총학생회 부회장으로 지내며 박정희 유신 잔당(전두환. 노태우) 장례식을 주도, 5월 15일에는 중앙 4000인 한강도하를 이끌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같은 해 5월 17일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계엄군에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3월 3.1절 특사로 풀려나기 전까지 6개월여 수형생활을 했다. 이후 고향인 보성으로 내려와 농민의 길을 걸으며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했다.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때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 약속했던 ‘쌀값 21만원 보장 공약’을 지키라고 참가했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고인은 317일간 사경을 헤매다 지난 9월 25일 사망했다.
고인의 운구는 낮 12시께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에 도착했으며, 광주시민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제가 열렸다. 이날 고인의 둘째딸 백민주화씨는 “이렇게 많은 분들께서 마지막길, 마지막 날 함께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며 “작년 11월 14일 아버지가 경찰 물대포에 맞고 317일 만에 단 한 번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가족들은 그 317일 기간 동안 그 이후에도 사실 마음껏 슬퍼한 적이 없었다. 슬퍼하는 와중에도 걱정해야 했고 불안에 떨어야 했고 무서워야 했고 분노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저희 가족 곁에 함께 해주신 많은 분들 덕분에 그 시간 다 이겨냈고, 부검이라는 끔찍한 현실에서 아버지를 구해내고 결국 아버지께서 고향에 돌아오실 수 있게 됐다. 정말 감사드린다”라며 허리 굽혀 인사드린 후 눈물을 닦았다.
문경식 고 백남기 농민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상임위원장은 “당신이 못 다 이룬 꿈 만들어 가겠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미래는 당신이 염원하던 생명과 평화와 따뜻하게 존경받는 이 세상이 될 것”이라며 “120년 전 녹두장군과 농민들이 꿈꿔왔던 노동자 민중들이 진정한 주인 되는 세상 될 것이다. 하늘에서 지켜봐달라”라며 고인의 영면을 빌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인 김명섭 신부는 “고인이 걸어오신 삶은 생명의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과 너무 닮아 있다”며 젊은 시절 독재 정권에 항거하고 고향에 돌아와선 평생 농부로서 생명을 보듬고 살았던 숭고한 삶의 여정과 죽음의 여정을 기렸다. 또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철저한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책임자가 처벌될 때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백남기 농민이 되어 불의한 세력에 끝까지 항거하며 싸워야하겠다”고 말했다.
참가 시민들은 ‘박근혜 퇴진’이라고 적힌 손 피켓과 함께 인자한 미소를 짓는 백남기 농민의 초상화를 들고 “박근혜를 몰아내고 민중세상을 건설하자”며 구호를 외쳤다. 이어 바리톤 정찬경씨는 고인이 평소 좋아했던 민중가요 ‘직녀에게’를 애절한 목소리에 담아 “슬픔은 끝나야 한다”며 억울한 죽음을 위로했다.
임추섭 백남기농민 광주투쟁본부 상임공동대표는 “고인이 쓰러져 병원에 누워계시는 동안에 고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됐다. 민주화투쟁에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언제 한번 당신이 그런 사실을 직접 얘기하지도 않았다”며 “꽹과리를 들고 활짝 웃고 있는 고인의 모습에서 성품을 알 수 있듯이 따뜻한 할아버지, 생명과 평화의 일꾼을 무지막지한 박 정권이 물대포를 앞세워 학살했다는 걸 결코 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반인륜적 반민주적 작태를 낱낱이 파헤쳐 물어야 한다”며 “당신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고인의 넋과 혼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고 추모했다.
이날 먼 길을 달려온 히다얏 그린필드 IUF 국제식품연맹 아태지역위원회 사무총장은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며 “저희 가맹조직 조합원(127개국 1200만명)들은 백 선생을 죽인 살인정권에 대해 분노하고 함께 격분하고 있다. IUF에서는 25개국의 언어로 백 농민의 타살에 대해서 조합원들과 함께 공유했으며, 여러분들의 목소리와 투쟁을 전 세계적으로 실어 나르겠다. 국제적으로 이 문제를 확대해서 한국 정부를 압박해나갈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이어 광주전남교육문화원 솟터 놀이패 신명 소속 오숙현 선생의 씻김굿이 이어졌으며, 광주지역 노래패는 민중가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참가시민들과 함께 불렀다. 백남기전남투쟁본부는 ‘백남기여 부활하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낭독하며 “백남기는 서서 싸우고 누워서 싸우고 죽어서도 싸운다”며 “순진하게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지 말자 싸우고 깨지자 백남기처럼”을 다짐했다.
노제를 마친 뒤 금남로에서 대인시장, 광주고 앞, 서방시장까지 3km가량 운구 행렬이 이어졌다. 고인을 죽인 살인정권 ‘박근혜 퇴진’이 적힌 깃발을 맨 앞에 세운 추모행렬은 뒤이어 ‘생명평화일꾼 백남기’ 농민의 붉은 명정을 세우며 운구행렬이 뒤를 따랐다. 이어 ‘국가폭력 끝장내자’ ‘책임자를 처벌하라’ ‘특검을 실시하라’고 적힌 50여개의 만장행렬 뒤로 광주시민 2천여명이 추모물결을 이루며 “살인정권 퇴진하라”는 외침이 금남로에 울려 퍼졌다. 고인의 장례행렬이 지나가자 시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인도로 나와 삼삼오오 눈시울을 붉히고, 가던 길을 멈춰 터져 나오는 슬픔을 삼키는 시민들도 곳곳에 있었다.
오후 3시께 광주시 영락공원 승화원에서 고인의 시신을 화장했다. 빈소에서는 가족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천주교에서 위령기도라고 부르는 연도를 진행 후 고인의 영면을 빌었다. 오후 5시께 한줌의 재가 된 고인의 유골은 민족민주열사들이 잠든 5‧18구묘역에 안장 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이곳엔 이한열과 강경대 열사, 김남주 시인 등 46명의 민족민주열사 유해가 함께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