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밥에 대한 추억

  • 입력 2016.11.04 14:11
  • 수정 2016.11.04 14:13
  • 기자명 황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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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미 (경북 의성군 봉양면)

갓 찌운 햅쌀로 밥을 해 먹는다. 뭐니 뭐니 해도 햅쌀밥은 요맘때가 제일 맛나다. 밥솥에서 나는 냄새부터 다르다. 이때쯤은 따로 반찬이 필요 없다. 밥맛만으로도 밥 한 그릇은 뚝딱이다.

나는 이때쯤에는 밥할 때는 잡곡도 섞지 않는다. 햅쌀밥 그대로의 맛을 느끼고파서다. 늘 쌀밥만 해 달라는 막내는 햅쌀 밥맛에 자기 그릇으로 두 그릇이나 비운다. 이모작도 이렇게 맛있는데 하물며 일모작이야 말한들 무엇 하리.

어릴 때 나는 아버지의 밥그릇만 보면서 밥을 먹었다. 친정어머니께서는 밥을 하실 때 많은 식구들을 대비해 항상 밑에는 미리 쪄둔 보리쌀을 안치고 쌀은 한 움큼으로 그 위에 올리셨다. 그래서 밥을 뜰 때 그 위의 쌀밥은 거의 아버지의 밥그릇에 담긴다. 우리 집에 유일하게 쌀이 많이 섞인 아버지의 밥그릇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고봉밥을 항상 조금씩 남기셨는데 나와 동생은 그 아버지의 남긴 밥을 먹기 위해서 눈치를 보면서 밥을 먹곤 했었다. 쌀이 많이 섞인 밥은 참 맛있었다.

40대 후반인 나에게 쌀밥에 대한 기억은 이 정도다. 보리밥이 먹기 싫었지 배고팠던 기억은 없다. 그러나 친정어머니의 말씀을 전해 들으면 굶기도 많이 하셨다 한다. 7남매의 맏이였던 60대의 큰언니는 나물죽이 죽기보다 먹기 싫었던 기억도 있단다. 박근혜 대통령과 거의 연배가 비슷한 큰 언니는 그렇게 맏딸로 자랐다. 그 밑으로 둘째 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밥이라도 제대로 먹으라고 부산 고모 집에 보내진다. 그때의 상처가 큰지 둘째 언니는 지금도 쉽사리 맘을 열지 않는다.

쌀밥에 대한 갈증을 해결한 것이 통일벼였다. 경상도 어른들이 말하는 ‘박정희 벼’다. 동네 어른들을 모셔놓고 마늘씨를 까면서 지금의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은 아직도 박정희 前대통령에 대한 맘이 절절하다. “내는 박근혜 나온다캐서 뒤도 안 돌아보고 찍었다!” / “배고픈 거 해결해줬지, 새마을 주택이라고 집도 지어줬제”.

지금의 농어촌 주택자금처럼 자금을 빌려줘 새마을 주택이라고 큰길에서 보면 보기 좋게 무늬만 2층집을 짓도록 해서 울 동네에는 같은 모양의 집들이 지어져 있다. 아직도 너무나 당당하시다. 옆에 것들이 다 해먹었다며 욕을 하신다. 옆에서 콤프래셔로 마늘을 불던 남편이 이때다 싶은지 박근혜는 내려와야 한다며 거드니 어른들의 얼굴이 모두 굳어진다. 일부러 뉴스를 피해 드라마만 나오는 TV 채널로 돌린다는 어른들께서도 심각성이 느껴지나 보다.

그 어려운 시절을 살아오신 어른들께 책임을 돌리고 싶지는 않다. 어린 자식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다고 믿는 신념이 쉽사리 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어른들의 절대적인 믿음을 그렇게 이용한 그네들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

이런 정치적인 이야기에는 금방 머리가 아프시다며 일이나 하자고 하신다. 우리는 마늘 잘 심는 것이 우리 할 일이라고…. 맞는 말씀이다. 다 자기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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