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보성 사람, 백남기

  • 입력 2016.11.04 13:54
  • 수정 2016.11.05 18:35
  • 기자명 정은정 <대한민국치킨전>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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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정 <대한민국치킨전>저자

“나는 보성 벌교 사람이오. 조정래의 <태백산맥>.”

얼마 전 담양에서 택시를 타니 기사 아저씨가 타지인인 내게 불쑥 진한 전라도 말로 말씀을 건네셨다.

“아, 보성이요? 백남기 어르신이 보성군 웅치면에서 나고 그곳에서 사셨다 하더군요.”

“보성 사람이 본래 기가 세오.”

기가 센 보성사람 백남기 어르신 장례를, 이제야 치른다. 아마 이 글이 농정신문에 실릴 즈음에는 광주 망월동 5·18 구묘역에 평안히 묻히셨을 것이다. 그래도 딴에는 글쟁이랍시고 지면 욕심은 있어서 가끔 돌아오는 <농정춘추> 당번이 걸리면 가급적 새로운 이야기를 담고 싶은 건방이 앞서곤 했다. 외람되지만 그동안 백남기 어르신의 이야기는 뉴스 복판을 차지하였으니(적어도 농판에서 말이다), 굳이 나까지, 라는 심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백남기 어르신의 생몰을 적어두고 오래도록 이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싶다.

다시 그 계절로 돌아왔다. 작년 11월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셨을 즈음, 규탄집회에 나가 올려다본 혜화동 백양나무 자태가 지금과 같았다. 긴 겨울 나려고 이파리 떨구고, 모진 겨울 견뎌낸 뒤 새잎 돋아나더니, 그늘 만들만큼 우거지고 이제 저 모양새다. 지구가 우주를 한 바퀴 도는 긴 여정이었다.

지난 9월 24일 백남기 어르신 칠순에는 아이와 함께 서울대병원 농성장, 아니 ‘어울림터’에 찾아가 생신 떡도 얻어먹고 돌아왔다. 생일의 주인공은 비록 병상에 계셨지만 그날 살아 있는 우리에게 떡을 먹여 주시고 다음 날 우리 곁을 떠나셨다. 외람되지만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다행이라 여겼다. 병상에서 너무 오래 고통 받으신데다 곁을 지킨 유족들 걱정도 앞섰다. 어찌됐든 ‘우리 아버지는 칠순까지는 사셨어’라고 자제분들이 주억거릴 수 있도록 생신까지 버텨주신 것 같기도 해서 말이다. 비록 책임자 처벌과 사과와 배상이라는 지난한 과정이 남았지만 육신만큼은 따뜻한 흙에서 쉬실 수 있겠구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비정상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혼이 빠져버린 권력은 부검이라는 희대의 칼날을 꺼내들고 유족들 가슴에 난도질을 해댔다. 다 적을 수 없는 수많은 고통의 과정이 있었지만 그 모든 과정을 처참했다고만 말 하고 싶지 않다. 백남기 어르신이 비록 찰나였지만 ‘절대공동체’인 5월 광주의 복판에 계셨고, 그 덕분으로 살아남은 우리에게 영 죽음의 공간일 것만 같은 장례식장을 ‘절대공동체’로 만들어 주셨다. 장례식장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국에서 몰려온 라면 트럭을 다시 가난한 이웃과 나눴고, 밥차에서는 따뜻한 국이 끓고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와서 끼니를 나누며 밤을 지샜다. 이 나라에서 가장 아픈 사람인 세월호 유족들의 연대를 지켜보면서 그날의 광주는 여기구나 여겨졌다. 생전에는 죽은 사람들도 있는데 무슨 유공자 신청이냐며 5·18유공자 신청조차 하지 않으셨다더니 스스로 5월 광주를 아예 혜화동으로 옮겨 오셨다.

보성 벌교에 가서 주먹자랑 말라거나 꼬막이나 보성 녹차 정도나 떠올리는 외지인들의 빤한 말들에 지치셨던 것일까. 택시 기사 아저씨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으로 내 입을 틀어막은 이유가 말이다. 해방공간의 좌우 대립과 분단까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뚫고 나오자니 기가 세지 않을 수 없던 보성 사람들. 그중에서도 가장 기가 센 보성 농민 백남기. 그곳에서 태어나 밀농사를 지으며 생명과 평화의 일꾼이란 이름으로 보성에서 살았다. 영원한 보성 사람 백남기, 이제 광주 망월동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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