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우리밀 걱정일랑 접어두고 이제 편히 쉬시요”

‘백남기 밀’ 파종한 후배 농민들 “고인 뜻 기릴 것”

  • 입력 2016.11.04 12:56
  • 수정 2016.11.04 13:03
  • 기자명 한승호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최영추(왼쪽), 최황호씨가 생전 고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듯 밀밭의 구석진 곳을 거닐며 '백남기 밀' 씨앗을 뿌리고 있다. 막걸리 한 잔에 불콰해진 최영추씨는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게 우리의 몫"이라 말했다.
로터리를 친 밀밭엔 퇴비만 4톤, 1톤에 가까운 비료가 구석구석 뿌려졌다. 이는 땅심과 더불어 밀 씨앗이 겨울을 버티는 힘이 된다.

남도에 머문 가을 하늘은 가슴 시리도록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시퍼런 하늘을 배경으로 주민들이 부춘마을 어귀에 내건 현수막이 스치는 바람에 펄럭였다. ‘의로운 사람 헌신하는 삶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지난 2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고 백남기 농민의 밀밭은 오래간만에 생기가 돌았다. 지난 6월 생전의 그가 뿌리고 간 밀을 수확한 뒤 관심 둘 이 없어 발길이 뜸해진 밀밭을 로터리 치고, 퇴비와 유박, 비료 등을 뿌리는 후배 농민들의 일손이 아침나절부터 부산스럽게 이어졌다.

지난해 고인의 쾌유를 기원하며 내건 빛바랜 현수막 옆엔 ‘이제 우리밀은 저희들이 책임 지겠습니다’라고 적힌 새로운 현수막이 가을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우리밀을 지켜내고자 했던 고인의 삶과 유가족의 뜻, 후배 농민들의 의지가 모여 우리밀을 다시 파종키로 한 것이다.

연분홍빛이 감도는 백중밀 씨앗을 손에 쥔 최영추(65), 최황호(65)씨는 생전 백남기 농민이 거닐었을 밀밭의 귀퉁이를 따라 걸으며 씨앗을 뿌렸다. 행여 서둘러 난 자리가 있을까 싶은 마음에 씨앗을 뿌리는 이들의 손길은 못내 조심스러웠다. 1만9,840㎡(약 6,000평)이나 되는 밀밭의 가장자리, 그늘진 곳으로 이들의 발걸음이 향했다.

“형님, 우리밀 걱정일랑 접어두고 이제 편히 쉬시요.” “민주주의 씨앗은 우리가 다시 뿌릴랑게.” 씨앗이 흩어질 때마다 농민들은 혼잣말을 하듯 고인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기계로 직파하지 못하는 밭의 구석진 곳 마다 뿌려진 씨앗엔 생전의 고인을 기리는 농민들의 정성이 오롯이 담겼다.

권용식씨가 백중밀 씨앗을 기계 살포기에 붓고 있다. 이날 400kg의 씨앗이 고인의 밀밭에 뿌려졌다.
겨우내 한파를 견디고 봄 햇살에 무럭무럭 크고 나면 우리밀은 40kg 들이 200가마의 양으로 농민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소나무를 단 트랙터가 밀밭을 누비며 씨앗 위로 흙을 덮고 있다.

이제 우리밀이야 고인이 한평생 일군 보성의 붉고 폭신한 흙과 밀밭에 이는 바람과 비, 양지바른 곳으로 찾아드는 햇살이 시나브로 키울 것이다. 게다가 그의 유지를 받든 후배 농민들이 푸르른 오월이면 밀을 걷고 찬바람 불 즈음엔 다시 씨앗을 파종할 것이다.

고인은 끝내 스러져갔지만 그가 남겨놓은 이 밀은 앞으로 ‘백남기 밀’이란 이름으로 보존되고 보급될 예정이다. 하여, 농업·농촌·농민 위기의 시대를 몸소 관통하며 생명농업의 숭고함, 우리 먹거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 고인의 뜻은 매년 생명이 움트는 봄, 넘실거리는 푸른 밀처럼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권용식(52) 보성군농민회장은 “형님께서 평생 민주주의 씨앗을 뿌렸듯 우리도 ‘백남기 밀’을 그렇게 뿌리며 보존할 예정”이라며 “고인의 뜻이 잘 기려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약 일주일, 혹 10여일 후면 씨앗은 싹을 틔워 붉은 흙 위로 새순을 밀어 올릴 것이다. 그러는 사이 고인은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하고 망월동 5·18묘역에 묻혀 영면에 들지만 밀밭 한 편에 쓰인 현수막 내용처럼 ‘생명과 평화의 우리밀로 다시 부활할 터’이니, 푸르른 오월엔 밀밭에 스치는 바람이라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말자.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