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바라지' 농사로 일군 한평생

농민운동 산실 상주 봉강리 여성농민 문달림씨
중학교 진학 못한 학생 위해 15년간 학원 운영
농민운동 남편 빈자리 채우며 농사에 전념

  • 입력 2016.10.30 14:40
  • 수정 2017.08.28 10:01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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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집 앞 감나무 앞에서 두 손 곱게 모으고 다소곳이 서 있는 모습이 오랜 세월 한결같이 살아온 여성농민 문달림씨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가을 햇살이 비친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원재정 기자

언니네텃밭 봉강공동체 생산자로 `현역 활동' 

세딸 합동결혼식 축의금, 심장병 어린이 치료비로 보태

들판의 벼는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제 막 타작이 시작된 듯 이따금씩 벼베는 광경이 눈에 띈다. 집집마다 울타리 삼은 감나무에 붉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은 여기가 곶감의 고장 상주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했다.

경북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 문달림 여성농민을 찾아 왔다. 우리나이로 79세. 문달림 여성농민은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으로 살아오신 분이다. 농사짓고, 애들 키우고, 외조하고, 여기에 농민운동까지. 그야말로 삶 자체가 운동의 표상이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한 마디 한 마디 조심스레 하는 말투에까지 녹아있다.

“70년대 초 농사를 시작했어요. 처음 2년은 농약을 치며 농사를 지었는데 벌레만 죽는 게 아니라 개구리, 뱀 등 모두 힘을 못 쓰고 거머리도 모두 없어지는 것을 보고 보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3년째부터 아예 농약을 안치기 시작했어요.”

유기농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던 그 옛날, 농약으로 모든 생명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깨달은 바가 컸다. 당연히 농사가 잘될 리가 없었다. 첫해에는 벼를 베지 못하고 멍석을 끌고 다니면서 여문 이삭만 골라 담아 수확을 할 정도였다. 5마지기 농사를 지어 겨우 양식거리를 했다. 다행인건 이후 2~3년 농약을 안치니까 천적이 생기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20마지기 논 농사를 지어 살림이 크게 어려울 게 없었는데, 7~80년대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동네 아이들을 모아 학원을 운영하느라 넉넉한 기억이 별로 없다. 농사지은 쌀을 팔아 살림에 보태기는커녕 쌀을 사서 먹는 경우도 허다했다. 학원은 수업료라는 걸 일체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가난한 산골농촌이라 중학교를 보내는 집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남편이 그 애들을 모아 학원을 운영했어요. 남편이 원장을 하고 주변에 대학 나온 분, 고등학교 나온 분들을 교사로 해서 아이들 가르쳤지요. 2년 과정으로 중학교 공부를 다 가르쳤어요. 학원을 마치면 고등학교에 진학 시키고, 취직시키느라 회사를 쫓아 다니기도 했어요.”

2년의 중학교 과정을 마친 아이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모두 공부 할게 없다고 할 정도로 교육의 질이 높았다. 취직을 하려는 애들에게는 주산을 가르치기도 했다. 주산선생을 모셔와 집에서 저녁마다 주산공부를 시켰다.

“저녁에 애들 열댓 명이 이 방에 쭈욱 앉아서 주산을 했어요. 그러면 그 애들 저녁을 다 해줬어요. 그때는 힘든지도 모르고 그저 공부하는 게 대견하고 사랑스러웠죠.” 시할머니 시할아버지 시어머니 층층시하 어르신들과 6남매까지 11식구와 살아가기에도 빠듯한 살림에 학원운영비까지 대야하는 형편이라 시어머니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다. 공부 가르쳐 놨더니 고향에 내려와서 엉뚱한 짓한다고.

“학원에 호야등피(남포, 호롱불)를 사는데 가마로 몇 단씩 샀어요. 돈이 없으니 쌀을 팔아서 돈을 댔는데 어머님께서 야단을 치시고 그랬죠. 궁리 끝에 제가 석유장사를 했는데 사실 말이 좋아 장사지 남는 것이 없었어요. 석유 한말을 사서 됫병에 나눠 파는데 열병하고 쪼금밖에 남지 않는 거예요. 쪼금씩 덜 주면 많이 남는데 어디 그래요. 더 주고 싶지. 그래도 어머님은 석유장사해서 많이 남아서 학원에 석유를 댄다고 흡족해 하시곤 했죠.”

농약 해로움에 유기농 전환

없는 살림 쪼개 학원 운영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환하게 웃는 얼굴에 소녀같은 수줍음도 서린다.

문씨가 이렇게 어려운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게 된 것은 자신이 어렵게 공부했기 때문이다. 5~60년대 여성들에게 학교며 교육이란 연관짓기 어려운 단어였다. 농촌여성들은 소학교조차 다니기 쉽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열댓 살에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와 시집간 언니가 있는 대구로 갔다.

“저도 어려워서 학교를 못 다녔어요. 주위에 부잣집 애들은 중학교를 가는데 나는 못가니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구에 언니네로 갔지요. 거기서 고학으로 공부를 했어요. 언니들이 대구 서문시장에서 바느질꺼리를 가져오면 밤에 바느질을 해서 아침에 가져다주고 하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 서울로 가서 신학공부를 하게 됐어요. 제가 어렵게 공부를 해서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지요. 나중에 돈을 벌면 어려운 애들 공부시켜주겠다고.”

그렇게 15년간 학원을 운영하다 중학교 가는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학생 수가 줄어 학원을 그만 두게 되었다. 이후에도 중학교에 못간 몇몇 아이들은 학원이 없어져 그나마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해 우는 애들도 많았다.

문씨는 대구에서 공부하면서 남편을 알게 되었고 서울에도 같이 올라가 공부를 했다. 그러다 남편이 신학교를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결혼을 하고 함께 이곳 봉강리로 내려와 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일꾼이 있었어요. 그런데 술만 먹으면 드러누워서 안 나오는 거예요. 놉을 얻어서 일을 하는 날도 안 나오고 한 3년 째 됐는데 점점 더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꾼을 내보내자고 했어요. 차라리 놉을 얻어서 일을 하는 게 낫겠다고. 그래서 일꾼을 내보냈지요. 그런데 어머님은 걱정을 많이 했어요. 우리가 일을 할 줄 모르니까. 그때부터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했지요. 일을 배우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해보지 않아 농사일은 마냥 서툴렀다.

그런데 남편은 야학한다, 새마을운동 한다, 농민운동한다고 해서 집안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가 그 빈자리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유기농 농사를 짓다 보니 일은 산더미 같았다.

“일 참 많이 했어요. 유기농을 하니 풀 뽑는 게 제일 큰일이죠. 풀 뽑느라 손이 다 닳고 숟가락 쥐기도 힘들 정도였어요. 그리고 밥을 해 대는 것도 큰일 이었어요. 매일 일꾼까지 13명의 삼시 세끼를 해댔으니. 그때는 한 달에 쌀을 80kg 두 가마씩 먹었어요. 지금처럼 가스레인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불을 때서….”

그녀는 여느 여성농민과 다름없이 농업노동과 가사노동을 감당하며 살아왔다. 또한 농민운동가의 집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다.

“김천, 성주 등 각지에서 농민운동하는 사람들이 찾아 왔어요. 그러면 그 사람들 전부 밥해 줘야하고…, 그래도 그분들을 만나면 형제들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지요. 운동하다가 숨어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왔어요.”

남편 오종면씨는 상주시농민회 초대 농민회장을 역임했다. 그녀의 집은 이미 70년대부터 경북지역 농민운동가의 양성소나 다름없는 역할을 했다. 이후에는 귀농하는 사람들의 교육장 역할을 꾸준히 해왔다.

“우리가 유기농을 시작하면서 이 동네가 유기농을 많이 하는데 유기농 하시는 분들 다수가 귀농한 분이예요. 우리집에서 1년씩 지내면서 농사 배워서 동네에 정착하기도 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정착하신 분도 있어요.”

문씨는 이런 귀농자들의 뒷바라지를 오랫동안 해왔다. 현재 전여농 김정열 사무총장도 그녀의 집에서 1년간 살다가 결혼하여 이웃에 정착해 살고 있다.

농민운동가 남편 적극 내조

귀농자 뒷바라지도 내일처럼

봉강리는 유기농 마을로 농민운동의 산실일 뿐 아니라 여성농민운동의 중심이기도 하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에서 하고 있는 언니네텃밭의 꾸러미 공동체 중 가장 모범이 되는 곳이 바로 봉강공동체이다. 15명의 여성농민이 꾸려가는 봉강공동체는 올해로 7년을 맞는다.

“매주 화요일 모여서 꾸러미 작업을 하지요. 그것이 끝나면 청소하고 다음 주 꾸러미 계획을 세우고…. 지금 123가구의 소비자 회원이 있어요. 초기에는 텔레비전에 나오고 그러면서 많을 때에는 170가구 정도까지 됐는데 여름휴가 지나면 조금씩 줄어들어요. 그리고 작년에 가격을 올리면서 많이 줄었어요. 우리는 가격 올리는 거 반대했는데 중앙에서 다 같이 올려야 한다고 해서 올리다 보니 아쉬움도 있죠.”

주 1회씩 한 달에 4번 제철꾸러미를 공급하는데 배송비 포장비를 제외하면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적다. 그래서 2015년 약간의 가격인상을 했다. 이것이 소비자회원이 감소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슬하에 딸 다섯 아들 하나 6남매를 두었다. 특이하게도 가정을 이룬 딸 다섯 모두 봉강2리 한 동네에 살고 있다. 아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6남매 모두 대학을 보냈다.

“어려우니까 모두 사범대학이나 국립대학을 갔어요. 자기들이 알아서 공부를 했지요. 큰딸은 교사를 하다가 명예퇴직을 했는데 젊을 때 돈이 없어서 대학원을 못 갔는데 지금 다시 공부를 시작해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유기농을 하는 동네가 좋다고 밖에 살다가 하나 둘씩 들어오더니 모두 같이 살게 됐어요. 학교 선생도 있고, 공무원도 있고, 농사도 짓고 그래요. 애들이 같이 사니까 좋지요.”

다섯 딸 중 셋이 합동결혼식을 치러 그 당시 화제의 결혼식으로 전국방송을 타기도 했다.

“첫째하고 둘째 결혼식을 가까운 친척만 불러서 했어요. 그러니까 주위 분들이 왜 연락을 하지 않고 잔치를 하냐고 성화를 했어요. 큰일을 여러 번 치르는 것도 폐가 되고 해서 셋째 넷째 다섯째를 합동을 하기로 했어요. 다행히 사돈어른들께서 이해해주셔서 그렇게 했지요. 상주대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했는데 사람들이 아주 많이 왔어요. 우리는 600명 식사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식당에서 오후 결혼이라 400명이면 충분하다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음식이 모자랐어요. 동네서 음식을 많이 준비해 와서 무사히 치를 수 있었어요. 부조금도 많이 들어 왔어요. 결혼식 비용 다 계산하고 2,000만 원이 남아서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말레이시아에서 심장병 어린이를 초청해 치료를 했는데 그 때 치료비에 보탰지요.”

세 딸 합동결혼식은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뿐 아니라 축의금으로 심장병 어린이 수술비에 보탰다. 삶의 면면이 나 보다 우리를 위해 열려있다.

“농사짓는 거 즐거워요. 유기농 하니까. 나물 하나도 좋은 거 먹잖아요. 이제 늙어서 힘이 들지만 꾸러미도 이제 그만두려고 하는데 젊은 사람들이 노인네들도 있어야한다고 해서 그만 두지 못하고 있어요. 들에 나물 같은 거 젊은 사람들이 모르는 게 많다고. 철철이 그런 거 캐서 보내야 한다고. 젊은 사람들 좀 더 도와 줘야 할 거 같아요.”

농사지으면서 어른 모시고 아이들 키우기도 힘겨울 텐데 동네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며, 농민운동가들 뒷바라지, 귀농자들 뒷바라지, 말레이시아 심장병 어린이 뒷바라지까지 아무런 대가 없이 어머니의 사랑으로 베풀어 왔다. 누구에게나 어머니 역할로 살아왔다. 한편 그녀를 아는 사람들 모두 남편이 밖에 나가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훌륭히 내조를 했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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