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화전민 ①] 산불이 났다

  • 입력 2016.10.29 11:50
  • 수정 2016.10.29 11:53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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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4학년 가을 무렵에 산불이 났다. 동네 뒷산이었다. 불길이 능선을 넘어 이웃마을까지 번져가는 등, 화재는 거의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나흘째 되던 날에 동무들과 뒷산 들머리의 도린곁, 우리가 소를 몰고 다니던 쪽으로 올라가 봤는데 불타버린 숲 여기저기에서 아직 연기가 나고 있었다. 대개는 쇠똥에 붙은 불이 잔불로 남아 연기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걱정하지 않았다. 엄니가 하는 말로는, 봄이 되면 온산에 도로 파릇파릇 싹이 날 것이라 했다. 오히려 불탄 자리에서는 고사리가 지천으로 올라올 것이라면서 엄니는 이듬해 봄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다만 한 가지, 미술시간에 마을 뒷산을 그리라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이 걱정이었지만, 그 동안 거의 쓸 일이 없어 모아둔 검정색 크레용이 여러 개 남아 있었으니 문제될 것 없었다.

윗말 지서 순경들이 여러 차례 찾아와서 수소문을 했으나 결국 불낸 사람을 잡지는 못 하였다. 영길이 할머니가 순경들에게 말했다.

“내가 똑땍히 봤는디, 그날 저녁에 큼지막한 별똥 한나가 그 짝으로 떨어지드랑께. 그래서 불이 난 것이여. 그랑께, 헛고상 말고 요놈 한 그럭씩 묵고 가봐.”

영길이네 토방에서 국수를 먹던 그 순경들이 지서로 돌아가서, 수사 일지에다 참말로 ‘방화범=별똥’, 이렇게 썼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다.

며칠 뒤, 나는 뒷산에 불을 지른 범인이 큰집의 상찬이 형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불길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언덕이 바로 큰집 소유의 산이었고, 그 형이 입버릇처럼, 그 곳을 갈아엎으면 수십 마지기의 밭을 일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엄니한테만 슬쩍 “상찬이 성님이 불 질른 것 아녀?”하고 물었을 때 엄니가 깜짝 놀라서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큰일 나”, 그랬던 점도 적잖이 수상쩍었다.

아닌 게 아니라 두어 달 뒤, 상찬이 형은 산을 밭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어느 날 외지에서 얼굴이 좀 무섭게 생긴 예닐곱 명의 청년들이 상찬이 형을 따라서 큰집으로 몰려오더니, 이튿날부터 연장을 챙겨 들고 뒷산으로 출동하였다. 제주도 어디에서 무슨 재건단(‘국토 재건단’을 일컬었던 듯)으로 일을 했던 사람들이라 했는데, 그것이 뭔 소린지 고작 4학년이었던 나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기운 세게 생긴 그 청년들은 밥을 거의 양재기째로 먹어댔고 술도 동이로 갖다놓고 마셨다. 뿐만 아니라 일도 무섭게 했다. 언덕 여기저기서 불에 그슬린 소나무와 참나무들을 쿵쿵, 베어 넘겼고 한쪽에서는 억센 곡괭이질로 땅을 마구 파헤쳤다.

내가 상찬이 형을 따라 그 언덕에 다시 올라간 것은 6학년 여름이었다. 청년들이 곡괭이질을 하던 그 언덕은 그런대로 밭으로 변모하여서 수수와 서숙(조)이 열매를 맺고 있었으며, 한쪽에서는 고구마 덩굴이 제법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형을 비웃었다.

“뭔 밭이 이래?”

밭이라고 했지만 여기저기에 아직 나무 등걸이 널브러져 있었고 풀과 나무 따위가 농작물만큼이나 사방에 우거져 있었다. 우리 엄니가, 손가락 길이의 지심 하나도 참지 못 하고 호미로 알뜰하게 매어 가꾼 밭에 비하면, 그 곳은 아예 밭도 뭣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외지에 나가 중학을 졸업한 뒤에 돌아와 보니, 그 언덕 밭은 꽤나 정결하게 정리가 돼 있었고, 고구마며 수수며 서숙 등이 알뜰하게 파종돼 있었다. 옥답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돌밭은 아니었다.

군대시절 강원도 홍천의 속칭 화전민촌으로 대민 봉사를 나갔다. 나는 함께 간 동기생에게, 상찬이 형이 고향 뒷산 언덕에 불을 질러 밭을 만든 과정을 들려주면서, 화전에 대해 좀 아는 체를 했다. 그런데 인근지역 출신의 그 동기생이 내 얘기를 듣고 나서 피식, 웃었다.

“바보야, 너의 사촌형은 화전을 일군 게 아니고, 그냥 밭을 개간한 거야. 산에 불을 지르고 그 불태운 재를 거름 삼아 옥수수 따위를 심어서 한두 번 수확하고는, 지력이 다 하면 내버리고 다른 산에 가서 또 불을 질러 곡식을 파종하는…그것을 화전이라고 하는 거야, 멍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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