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의 농민, 손을 맞잡다

  • 입력 2016.10.14 17:03
  • 수정 2016.10.16 23:38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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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최용탁 소설가]

남북한 정상이 평양에서 회담을 갖는다는 소식을 남북이 동시에 발표한 것은 2000년 4월 10일이었다. 회담 날짜는 두 달쯤 후인 6월 12일부터 사흘간이었다. 분단 이후 처음인 정상회담에 대해 국민들은 당연히 환영했지만 그 동안 어그러지기 일쑤였던 남북관계로 인해 성사되기까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 또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예정보다 하루가 늦어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과 영접 나온 김정일 위원장이 악수와 포옹을 나누는 장면은 그야말로 감격적이었다. 반세기만에 이루어진 정상회담은 사흘간 이어졌고 역사적인 6.15선언이 발표되었다. 선언의 주요 4개 기본조항은 통일로 가는 징검다리로서 남북 민중의 염원이었다.

'남북농민통일대회'의 주석단에서 박수를 치고 있는 대표단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이듬해 봄, 전농은 북녘에 못자리용 비닐을 보내는 일로 6.15선언 실천의 첫 사업을 시작한다. 두 차례에 걸쳐 284톤, 약 3억5,000만 원 어치의 비닐을 보낸 것이다. 당시 북한의 낮은 쌀 생산성은 못자리 비닐의 부족이 큰 원인이었다.

이 사업을 위해 일일찻집과 거리 모금, 폐품 수집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대북지원의 당위성을 알리고 대중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었고 농민들의 통일의식을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전농은 이 사업을 통해 북한의 조선농업근로자동맹과 공식적으로 연결되어 역사적인 남북농민대회가 열릴 수 있었다.

남북의 농민들이 통일열차 이어달리기를 하며 우의를 다지고 있다.

마침내 만났다!

6.15공동선언은 농민운동 진영에 커다란 감동과 충격이었다. 선언은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킨다고 명시하였고 이는 농업계가 중요한 참여 주체가 되어야함을 의미했다. 통일농업은 오래전부터 전농의 강령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90년대 초부터 통일농업의 상을 제시하며 일정부분의 지향점을 가지고 진행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통일농업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남북이 서로 만나 논의를 진행시킬 수 없었고, 북쪽 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시키기도 어려운 문제였다.

이것이 6.15공동선언으로 새로운 물꼬가 트이게 된 것이었다. 우선 만나야 했다. 준비과정에서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있었고 1,000여 명으로 계획했던 농민방북단이 배편 문제로 600여 명으로 축소되는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2001년 7월 17일 드디어 남한의 농민 620명은 속초항에서 출발하여 어둠이 내린 장전항에 도착한다. ‘6.15공동선언 관철을 위한 남북농민통일대회’에 참가한 남측 농민들이었다.

다음날 아침 남북의 농민들은 온정리 김정숙휴게소 운동장에서 첫 상봉을 했다. 1,300명의 남북 농민들은 ‘반갑습니다’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처음으로 손을 맞잡았다. 처음 만났지만 농민들은 별 어색함 없이 서로를 친숙하게 느꼈다. 전농 정광훈 의장의 개회사로 대회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존경하는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승상섭위원장님을 비롯한 성원 여러분, 그리고 북녘 동포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조국이 분단된 지 55년 만에 성사된 남과 북 농민대중의 첫 만남은 통일의 물고를 트는 역사적인 만남입니다. 천하의 명산 금강산 자락 이곳에서 남과 북 농민들이 공동으로 행사를 하게 된 것은 남과 북 정상수뇌분들이 민족의 염원을 담아 함께 합의한 6.15남북공동선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였습니다.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은 남선과 북선, 우리 민족에게는 물론 세계만방에 우리 민족의 문제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도, 간섭받지도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선포함과 동시에 세계 평화의 축복의 선언이며, 조국통일의 나침반입니다…… 자주적 인간, 사회적 인간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통일세상을 이루어 냅시다. 우리농민들이 앞장서서 사회, 문화, 정치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통일 국가를 만들어 갑시다.’

이어진 전여농의 김순옥 회장의 개막연설은 농민들이 통일과 남북농업에 대해 가진 생각을 잘 밝힌 연설이었다.

‘지난해 역사적인 6·15공동선언 이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남북간의 통일의 열망과 그 실천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도 노도와 같은 통일의 물결을 함께 만들고자 이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전여농이 북측농민께는 생소한 조직이라 여겨지실 것입니다. 현재 이 땅의 농민들은 대책 없는 개방농정으로 농민들의 삶은 점점 찌들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여성농민의 생활은 농민의 삶으로서도 최하위요, 여성의 지위에서도 가장 뒤떨어지고 소외된 처지에 있습니다…… 남북농민형제 여러분! 지난 50여년의 세월동안 억지로 갈라진 채 우리농업은 소위 경제발전의 희생양으로 억울하게 빼앗기고 무시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6·15공동선언 이후 북측농민형제들과의 만남을 통해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북농업의 균형발전으로 민족의 생명을 지켜낼 통일농업의 실현인 것입니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서로 돕는 상부상조의 정신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민족의 살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남북농민통일대회’ 첫 날은 개막식에 이어 남북 예술인 축하공연, 민속체육 및 유희오락경기 등으로 이어졌다. 그 중에서 참가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것은 두 시간에 걸친 솔밭에서의 점심식사였다. 한 번도 음식을 먹는 것이 허락된 적 없었다는 깨끗한 솔밭에 특별히 남녘의 농민들을 위해 상이 차려졌고 음식과 술을 나누며 남북의 농민들은 금세 하나가 되었다. 곳곳에서 노래와 춤이 이어지는 흥겨운 마당이 되었던 것이다.

긴 세월 동안 떨어져 이었음에도 농민들은 다른 직종과 달리 생각에 큰 차이가 없었다. 수천 년 동안 땅을 기본으로 삼아 살아온 농민계급의 연대감은 그렇게 남달랐던 것이다.

둘째 날 금강산 산행을 함께 한 농민들은 점심을 먹고 이틀간의 만남을 마치고 폐막식을 했다. 북한의 승상섭 농근맹 위원장은 감격적인 폐막 연설로 남녘의 농민들을 울렸다. 한 사람 한사람이 서로 손을 잡으며 헤어지는 마당은 아쉬움과 감동이 뒤섞여 눈물짓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잘 가시오, 다시 만나요’ 노래가 애절하게 등 뒤를 따라오는 가운데 남녘의 농민들은 역사적인 대회를 마치고 남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이 날 ‘ 6.15공동선언 관철을 위한 남북농민통일대회 공동 보도문’이 발표되었다.

통일농업을 향하여

6.15선언과 남북농민대회를 전기로 통일농업에 대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통일농업은 단순히 식량사정이 어려운 북한을 돕는 운동이 아니다. 질곡에 다다른 남한 농업의 활로를 위한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는 게 통일농업이다.

남북이 초보적인 연방 단계에서라도 경제적 통일을 선언한다면 기존 세계무역질서 속에서 운신의 폭이 좁은 농업정책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가져갈 여지가 생기기도 한다. 또한 남쪽에서 남는 쌀과 북한에서 많이 생산되는 사료작물의 호환만으로도 상당한 수요공급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북한의 식량난이 결정적으로 풀리는 동시에 남측의 농업경쟁력이 살아나 민족농업의 전도가 확연히 열리게 된다. 농업파탄이 아니라 사회적인 귀농바람이 불어 실업상태의 청년들이 농촌을 찾을 수도 있다.

농촌의 사회적 인프라 투자가 늘어나 내수경제가 활성화되며 도시인구 과밀현상이 해소되고 농업사회구조의 노령화까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통일농업은 우리 농업을 근본적으로 되살릴 수 있는 획기적인 구상이기도 하다.

전농은 2002년에 ‘통일 쌀 보내기운동’을 통해 200톤의 쌀을 북으로 보냈고 이는 민족적 차원에서 식량자급의 중요성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우리 농업의 방향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농은 통일 쌀 짓기와 못자리 비닐보내기, 종자교류 등 꾸준히 남북 교류와 통일농업의 길을 모색하였지만 이후의 정치적 상황은 통일농업에 불리하게 조성되었다.

농림부의 관료들은 통일농업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열의도 없었으며 남북 간의 정세도 미국의 개입에 따라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는 형국이었다. 결정적으로 보수반동정권이 들어서면서 2007년까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던 남북농민대회도 더 이상 열리지 못했고 남북의 교류는 일체 중단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하지만 긴 농민의 호흡과 눈으로 보면 이미 물꼬가 튼 통일농업은 다시 시작될 것이며 남북의 통일 또한 가장 요원해보일 때가 가장 가까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 통일농업의 과제는 농민들에게 여전히 중차대한 오늘의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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