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엿 ①] 엿장수가 왔다!

  • 입력 2016.10.07 14:30
  • 수정 2016.10.07 14:4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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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어논다. 제가끔 쉼 없이 질러대는 소리들에다 부연 흙먼지까지 뒤엉켜서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그러나 왁자지껄 까불거리며 뛰어노느라 정신을 온통 다 팔고 있는 듯 보여도, 그들 중에는 유난히 귀가 밝은 녀석이 꼭 있다.

“야, 야, 다들 가만있어 봐! 시방 뭔 소리가 났는디…”

아이들이 엉거주춤, 하던 짓을 멈춘다. 그때 고샅길 모퉁이에서 그 사람이 등장한다. 쩔겅쩔겅, 가위소리를 울리면서.

“우와, 엿장수다아!”

하지만 아이들이 탄성을 내지르면서 달려간 곳은 엿장수 쪽이 아니었다. 녀석들은 마치 출동명령을 받은 5분대기조의 이등병들처럼 재바른 동작으로 저마다 자신의 집으로 내달린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수색작전이 시작된다. 맨 먼저 살펴봐야 할 곳은 마루 밑이다. 평소 그 곳은 어둠침침하고 퀴퀴하여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않던 곳이다. 금세 지네라도 한 마리 기어 나올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 것을 두려워 할 계제가 아니다. 납작 엎드린 채 아부지의 지겟작대기를 휘둘러 온갖 물건들을 끄집어내어서 재물조사를 시작한다. 그 시절엔 꽤 여러 식구가 한 집에 살았으므로 대개는 그렇게 한 번 훑어내면 마루 밑에서, 떨어진 고무신 한두 켤레는 나오게 돼 있었다. 재수가 좋으면 빈 병이나 찌그러진 냄비가 굴러 나오기도 했다. 고놈을 들고 다다다닥, 엿장수에게로 달려가는 꼬마의 두 다리에 아예 5마력 발동기가 달렸다.

하지만 마루 밑이나 헛간이나 부엌을 다 뒤져도 엿 바꿔 먹을 고물이 없는 경우가 문제다. 아이는 갈등 끝에 아직 쓸 만한 물건 하나를 부모 몰래 슬쩍 가져간다. 엿가락 한 토막을 입에 물면 온 세상이 풍성해 보이던… 그 달콤한 유혹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때 좀 착한 엿장수는 집에 도로 갖다 두라고 돌려보내지만, 덜 착한 엿장수는 모른 척하고 엿가락과 바꿔준다. 어떤 아이는 멀쩡한 고무신을 일부러 찢어서 가져가기도 했다. 종종 부모가 달려와서 엿장수와 실랑이를 벌일 때도 있었다.

“존 말 할 때 우리 집 머시마가 아까침에 갖고 온 양은냄비, 그거 내놓드라고 이.”

영출이 엄니가 다짜고짜 엿판 아래에 있는 고물 자루를 마구 뒤진다. 그러나 찾아내 봤자 이미 그 냄비는 엿장수의 발뒤축에 밟혀서 엉망으로 찌그러져 버렸고, 영출이는 엿가락을 물고 놀이터로 튀고 없으니, 현물거래가 완료돼 버렸다. 엿장수를 장물아비로 몰아붙여 질책을 하자니 그렇게 되면 자신의 귀한 아들을 도둑놈 취급을 한 셈이 된다. 결국 영출이 엄니도 엿 한 덩이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나도 엿을 먹고야 말겠다는 달콤한 유혹을 이기지 못 하여, 사용 가능한 살림을 무단 반출했던 전과가 있다. 동네에 엿장수가 찾아왔던 어느 겨울 날, 마루 밑에서 꺼낸 장화 한 짝을 앞에 놓고 심각한 고민에 싸였다. 아부지가 논에 물 보러 갔다가 나무 끌텅을 잘 못 밟아 구멍이 나버린 것인데, 나중에 땜장이가 오면 때워서 신을 것이라 했다. 나는 궁리 끝에 ‘때워서 신을 것’이라고 했던 아부지의 그 뒷말은 못 들은 것으로 정리했다.

‘장화의 발목께에 구멍이 났으니 이제 이건 더 이상 장화가 아니다. 고물이다.’

그래서 엿장수에게로 가져갔다. 고무신을 가져갔을 때보다 엿가락이 세 배나 더 길었다. 이듬해 봄에 아부지가 문제의 그 장화 한 짝을 찾느라 온 집안을 뒤적거렸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이실직고 했다. 아부지가 성난 낯빛을 하고서 회초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내 내려놓았다. 정직하게 고백을 했으니 용서해주겠다 했다.

엿장수가 가위를 치면서 호객하는 소리를 ‘엿단쇠’라 하였다. 그러나 사람마다 외치는 소리가 달랐다. ‘엿장수 맘대로’였다.

“자, 엿이 왔어요. 엿들 사려! 둘이 먹다 혼자 죽어도 모르는 찹쌀엿이 왔습니다! 떨어진 신발이나 못 쓰게 된 냄비, 빈 병 있으면 갖고 오시오! 쌀, 보리, 콩, 팥, 수수도 받습니다. 신랑 각시 첫날밤에 오줌 누다가 빵꾸난 놋요강도 받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도 놋쇠로 만든 요강이 둘이나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빵꾸난’ 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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