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27년 농사 중 가장 힘든 해

뚝심있는 당진 농민 이종섭

  • 입력 2016.10.02 11:56
  • 수정 2016.10.04 10:11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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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농민운동이 전체 농민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고 있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농자재 무상지원 사업도 그렇고 지역사회에서 부조리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도 농민운동의 역할이고 또한 보람입니다” 한승호 기자

추석을 쇠고 1주일째 되는 지난달 22일. 전국의 농민 5,000여명이 서울 한복판에 모였다. 쌀값폭락에 항의하기 위한 농민대회가 개최됐다. 대학로에서 광화문으로 행진하는 중에 돌연 콤바인 한 대가 농민 대오 앞에 등장했다. 대중교통과 도시민들로 가득 찼던 종로거리가 생경스런 콤바인을 앞세운 농민들의 절박한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농민들은 ‘쌀값 21만원 보장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후보시절 선거 현수막을 들고 콤바인을 따라 행진을 했다. 2016년 가을, 수확기를 앞둔 서울의 풍경이다.

이 행진대열에는 당진시농민회 사무국장이자 전농충남도연맹 사무처장 이종섭(50) 농민이 함께 하고 있었다.

이종섭 농민은 거리에서 투쟁은 물론 국회의 정책 토론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해서 힘을 보탠다. 3만5,000평의 논농사를 지으면서도 지역 활동가로 30년 가까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쌀 문제가 농업문제의 현안으로 부상한 지금 쌀 전업농이며 27년간 농민운동가로 쉼 없이 달려온 이종섭 농민을 만나기 위해 농민대회 다음날(9월 23일) 당진으로 갔다.

당진농민주유소 2층에 있는 당진농민회사무실에서, 만나자마자 쌀 이야기를 풀어 놨다.

“요즘 각종 언론에서 전화가 와서 쌀값이 몇 퍼센트 떨어졌냐고 물어 보는데 지금 상황은 몇 퍼센트라고 말 할 상황이 아녜요. 딱 반토막이 났어요. 20여년 전 가격이 아니라 30년 전 가격입니다. 조생종 벼를 kg당 800원씩 수매를 했는데 작년에는 1,400~1,500원 했거든요. 물론 이게 우선지급금이라 추가 정산을 하는데, 과연 얼마나 더 주겠어요. 만생종에 대해 농민들이 기대치를 갖고 있는데. 1,000원대가 무너지랴 하고 있어요. 그런데 무너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작황이 조생종보다 나쁘지 않고 날씨가 좋아 증수율은 계속 올라갈 것입니다. 우리지역 농협을 보면, 합덕농협은 조생종을 1,000톤 받았는데 400톤 처리했다고 합니다. 지금 600톤이 남았다는데 더 이상 쌀 판매능력이 없어요. 이러니 쌀값이 더 떨어지죠. 농민들은 막연히 기대심을 가지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기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럼 농민들이 무슨 대책이 있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식으로 하면 싸우는 거 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집에 쌀을 쌓아 둘 수도 없고. 대농보다 중소농이 문제가 심각해요. 농협이 전량 수매하는 것이 아니라 건조시설이나 저장시설이 없는 중소농가들은 수확기에 싼값에 일반 유통에 낼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같으면 수확기에 쌀장사가 대거 들어오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요. 그러니 가져만 가준다면 감지덕지 하고 팔아야 하는 상황이죠.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답이 없습니다.”

뚝심 있는 그도 답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농사지은 얘기를 들으면 실마리가 풀릴까. “군대 제대하고 사업을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내려와 농사를 짓는 게 어떻겠냐, 권유하셔서 시작하게 됐죠. 처음에는 아버님을 도와 농사를 지었고, 결혼을 하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농사를 물려받았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님과 어머님이 농사에 큰 힘이 되어 주시고 있어요.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어머니 아버지 일 그만 시키라고 할 정도예요. 아버님은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셔서 아주 개방적 인 분이세요. 그래서 저를 많이 이해해 주시고 지원해 주세요. 아주 존경스러운 분이세요.”

이종섭 농민은 농민운동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태신앙이란 말이 있는데, 모태농민운동가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쉽겠다. 자연스럽게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아버지도 가톨릭농민회 초창기 회원이고 작은아버지는 2대 당진농민회장, 사촌형은 당진농민회 사무국장과 회장을 역임했다.

“우리집안 모두가 가톨릭농민회 초창기부터 활동을 했어요. 집안의 영향으로 89년 군에서 제대하고 내려와서 분회 창립을 하면서 농민운동을 시작했죠. 작은아버지인 당시 이만영 농민회장께 교육을 받고, 합덕읍 신석리에서 신석분회를 창립해 분회장을 했는데, 그 당시 제가 전국의 최연소 분회장이었어요. 97년 당진농민회 사무국장을 맡게 됐어요. 전임자가 사촌형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농민회 간부를 하려는 사람이 없으니까 동생인 저한테 맡겼죠. 그리고 10년 후인 2007년에 다시 사무국장을 맞아 10년째 하고 있어요.”

당진시농민회는 회장하고 사무국장하고 임기가 엇갈리게 돼 있다고 한다. 한꺼번에 회장·사무국장이 교체 되면 업무의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새로 선출된 회장들이 회장 수락 조건으로 “사무국장은 이종섭이 해야 한다”고 해서 10년째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10년째 사무국장’ 타이틀은 무엇보다 책임감과 강력한 추진력 때문이다.

당진시농민회는 전국 농민회 중에서 활동력이 으뜸으로 꼽힌다. 전국 최고의 농민회인데 비결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했다.

“초창기에는 활동자금이 없으니까 항상 돈을 걷어서 일을 했어요. 회의를 하든 대회를 가든 전부 돈을 걷어서 하니까 회원들의 불만이 쌓여 갔지요.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87년 제가 사무국장을 하면서 자동이체 계좌를 만들어서 회비를 걷자고 총회에서 결의했습니다. 그때 매달 3,000원씩 자동이체 하기로 하고 제 이름으로 계좌를 개설 했어요. 그 당시 반응이 좋아 사무실도 얻고……. 지금 자동이체 회원이 600여명 됩니다. 그리고 우편물이 나가는 회원수가 700여명 됩니다. 초기부터 간부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후원회원도 모집하고, 우리가 자주 가는 식당이나 상점들도 참여를 부탁해서 후원회원에 가입해주고 있어요. 사무실 유지비, 활동가와 근무자 활동비 정도는 회원들이 책임져 줘야 조직이 유지 될 수 있어요. 20여년 농민운동하면서 느낀 게 그래요.”

당진시농민회에서 운영하는 주유소도 궁금했다.

“자동이체를 해도 항상 자금난에 허덕였죠. 그래서 경제사업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고 전농에서 하는 경제사업들을 전부 살펴보고 그러던 중에 농업용 면세유로 농협이 부당이익을 많이 취하고 있는걸 알게 됐고, 당진이 기름값이 비싸서 시작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판매소에서 시작해서 자금을 모아 지금의 부지를 마련하여 주유소를 운영하게 됐어요.”

당진농민회 주유소는 어려움도 여러 번 겪었다. 특히 2008년에 농민회에서 운영하는 전국의 농민주유소 20여 곳에 일제히 법인세가 부과된 일이 있었는데, 수년간 법인세 면세로 운영하다 한꺼번에 수년간의 세금이 추징된 것이다. 당진농민주유소는 2억원이 넘는 세금을 추징당했다. 상당수 농민주유소들이 이때 경영위기를 맞아 폐업했다.

“당진에 제철소·발전소 등으로 농민주유소 사업이 잘 됐어요. 그래서 출자배당을 10%씩 하니까 시내의 돈 있는 사람들이 대거 출자를 하게 되면서 운영상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농민주유소가 농민들의 권익을 위해 만들어 졌는데 일반 출자자들은 이러한 농민회 사업에 지원을 반대하고 농민회 면지회장이 주유소 이사를 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어요. 갈등도 생기고, 그래서 3년 전부터 농민회원이 아니면 조합원 가입을 받지 않든지 아니면 의결권이 없는 준조합원으로 받기로 했어요. 매출이 줄더라고 농민회의 취지에 벋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로. 한편으로는 농민회 틀 안에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았어요.”

당진하면 간척지 농사 문제도 있다.

“농어촌공사에서 대호간척지를 임대하는데 부당하게 특정법인들에 몇 십만 평씩 준걸 알게 됐어요. 법인들은 감당 못하니까 농민들에게 몇 천 평씩 떼어주고 머슴처럼 부려먹은 거죠. 그래서 농어촌공사에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했죠. 당진에 농민단체가 많이 있는데 농민단체는 배제하고 특정법인에게 대규모로 땅을 나눠주냐고…….

그래서 그 땅을 농민단체가 임대 받아서 농사를 짓게 됐고 농민회도 그 때 간척지 농사를 짓게 됐어요. 그런데 석문간척지가 완공 되면서 석문간척지로 오게 됐어요. 처음에는 갈대만 무성한 불모지 같은 땅을 14년 농사를 지어서 옥토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명박 정부에서 타작물재배 사업을 시작하면서 대호간척지 1,500ha 전부를 타작목으로 전환하라고 했어요. 농민회는 다른 작물은 맞지 않다고 반대하며 버티다가 6월에 가서 못자리를 하고 7월 1일 모든 언론을 불러 놓고 모내기를 했지요. 이 일로 계약 위반이라고 벌금 물고 농지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죠.”

2012년 이명박 정부의 타작물 지원 사업으로 석문간척지에 사료작물 옥수수 콩 등을 재배 했지만 염분피해, 담수피해 등으로 정상적인 수확을 못했다. 결국 정부는 이듬해부터 다시 벼를 심게 했다. 이 사업은 정부의 무사안일 한 탁상행정 표본으로 꼽힌다.

올해 충남도연맹 사무처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전부터 처장을 하라고 했는데, 작년 말에는 도연맹 간부들이 사무실에 와서 죽치고 있으면서 무언의 압박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직 사무처장이 어려움에 처해 있기도 하고 해서 짐을 덜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수락했습니다. 농민운동 20여년 해 왔는데 어차피 한 번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데 실제 해보니까 생각보다 부담이 너무 커요. 회의도 많고……. 집에는 아직 말도 못했어요.”

27년 농민운동 소회는?

“원래 내성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농민운동을 하면서 교육도 받고 간부로 활동하면서 성격이 바뀌었어요. 초등학교 친구들은 제가 TV에 나오고 농민대회에서 앞장서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요. 농민운동이 제 삶에 큰 변화를 만들어 준 것이지요. 농민운동이 전체 농민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고 있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농자재 무상지원 사업도 그렇고 지역사회에서 부조리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도 농민운동의 역할이고 또한 보람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우리 회원들이 잘 따라주고 있어서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수확을 앞둔 들판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아무리 쌀값이 폭락했다 해도 농사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농민들의 마음이다. 한승호 기자

인터뷰를 마친 이종섭 농민은 논으로 달려갔다. 수확기를 앞두고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다. 논두렁을 오가며 물고를 확인하며 다니기에 분주했다. 들녘의 벼는 차츰 푸른 끼를 벗고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석문간척지의 넓은 들녘 논두렁 절반은 풀이 무성하다. 나머지 절반에는 콩이 심어져 있었는데 역시 손이 가지 않아 풀이 함께 자라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서로 논두렁을 얻어서 콩을 심으려 했는데 요즘은 콩 값이 싸서 심으려는 사람도 없고, 심어놓은 콩도 가꾸지 않아서 풀이 더 무성하다고 한다. 누렇게 익어가는 쌀도 그렇지만 알뜰살뜰한 농촌의 풍경인 논두렁의 콩 마저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우리 농촌의 씁쓸한 현실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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