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민의 죽음’ 백남기 농민 운명

사회 각계 추모 속 고인 죽음 내몬 박근혜정권 질타 쇄도
검경, 대규모 병력 동원해 시신탈취 기도했으나 실패

  • 입력 2016.09.30 13:05
  • 수정 2016.09.30 13:12
  • 기자명 홍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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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홍기원 기자]

백남기 농민이 지난달 25일 일요일 운명했다. ‘한국농민의 죽음’ 앞에 각계각층은 국가폭력의 책임을 묻고 백남기 농민의 뜻을 이어 민주주의 회복, 식량주권 사수에 나서겠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물대포 직사 살수로 백남기 농민을 죽음으로 내몬 박근혜정권은 대규모 경찰 병력을 병원에 난입시켜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마저 국가폭력으로 막아섰다.

앞서 전날인 24일은 백남기 농민의 70번째 생신이었다. 서울대병원 의료진은 백남기 농민의 가족들에게 주말을 넘기기 힘들다고 전했다. 여기에 이 사건을 10개월 동안 ‘조사’만 하고 있던 검찰에서 부검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며 가족들의 가슴에 또다시 그늘을 드리웠다.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서 경찰의 물대포 직사 살수를 맞고 쓰러진 농민 백남기(70)씨가 의식불명 317일 만인 지난달 25일 생을 달리한 가운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입구에서 부검을 위해 시신을 빼앗으려는 경찰에 맞서 시민, 학생들이 연좌농성으로 맞서고 있다. 한승호 기자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백남기 대책위)는 이날 논평을 내 “사과도 책임도 처벌도 없이 백남기 농민과 그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정권이 부검을 실시하겠다며 파렴치함을 드러내고 있다”며 즉각 부검시도를 규탄했다. 이날 밤, 경찰은 병력을 동원해 서울대병원을 둘러싸며 시신을 탈취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다음날 오후 2시께 백남기 농민이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끝내 운명하자 경찰들은 마치 사냥감을 찾듯이 시신을 탈취하려 했다. 병원 본관에서 장례식장까지 불과 400여m 남짓한 거리는 백남기 농민을 지키려는 시민들과 경찰이 충돌하며 아수라장이 됐다. 고인의 시신은 오후 3시 50분쯤에야 영안실에 안치됐다. 경찰은 장례식장을 포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며 시민들을 위협했다.

이 날 경찰은 서울대병원이 시설보호를 요청했다는 구실로 인근에 4,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경찰의 목표는 백남기 농민의 시신이었다는 게 현장을 지킨 시민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속속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각 언론매체가 실시간에 가깝게 현장을 중계하자 경찰은 슬그머니 장례식장 포위를 풀었으나 병력을 물리지는 않았다.

밤이 되자 시민들은 수백여명의 경찰 병력과 마주한 채 촛불을 들었다. 서울시 광진구에 산다고 자신을 밝힌 한 시민은 “백남기 농민이 숨을 거뒀다는 비보에 앞이 캄캄했다”면서 “엄연히 살인이다. 박근혜 정권은 더 이상 국민을 위한 정권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백남기 농민의 사투를 지켜본 현정희 전 서울대병원 노동조합 지부장은 울먹이면서 “곧장 응급실로 수송만 했어도 이렇게 돌아가시진 않았을 것이다”라며 “국민의 생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병원에 있는 어르신 면회도 오지 않는 이 정부는 정부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정현찬 가톨릭농민회 회장은 “힘없는 농민이 자기 목소리를 낸다고 이렇게 처참히 죽일 수 있는가”라고 절규하며 “살인정권, 살인농정에 맞서 국민 모두가 떨쳐 일어나자”고 외쳤다.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의장도 “쌀값 폭락은 돈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문제이며 인권의 문제다”라며 “박근혜 독재권력 밑에선 농민, 노동자, 서민, 시민이 올바로 살 수가 없다. 이제는 (박근혜정권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백남기 농민이 운명한 뒤, 사회 각계의 추모의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전농은 이 날 “전국의 농민들은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한국농민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대통령이 사죄하지 않으면 정권 퇴진투쟁에 나설 것이다”고 강력 경고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같은날 “정부는 고 백남기 농민과 유가족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이 문제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국회도 국정감사에서 물대포 직사 문제, 그리고 쌀값 폭락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라”고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도 각각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같은날 백남기 농민의 명복을 빌며 부검 반대와 살인진압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반면, 새누리당은 4문장의 짧은 브리핑에서 “시위가 과격하게 불법적으로 변하면서 파생된 안타까운 일”운운으로 고인을 모욕해 “차라리 침묵하라”는 빈축을 샀다.

검경은 25일 밤에서 26일 새벽 사이 법원에 부검을 위한 압수수색검증영장을 청구했지만 서울중앙지법이 기각하며 시신탈취의 법적명분을 얻는 데 실패했다. 결국, 경찰은 26일 오전 약간의 병력만 남긴 채 병원에서 철수했다. 밤을 새워 백남기 농민 곁을 지킨 농민, 노동자, 시민이 이뤄낸 첫 승리다.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 약력

1947년 8월 24일(음력) 전남 보성군 웅치면 출생

1968년 3월 중앙대학교 행정학과 입학

1971년 10월 교내 유신 철폐 시위 주도. 1차 제적

1975년 전국대학생연맹 가입 및 2차 제적

1980년 3월 복교

1980년 5월 17일 계엄군에 체포

1980년 7월 30일 중앙대학교 퇴학 처분(3차 제적)

1980년 8월 20일 수도군단보통군법회의서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 선고

1981년 3월 3일 3.1절 특사로 가석방. 보성으로 귀향

1986년 가톨릭농민회 가입

1987년 가톨릭농민회 보성,고흥협의회 회장

1992년~1993년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

1994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참가 중 경찰 물대포에 쓰러진 뒤 의식불명

2016년 9월 25일 서울대병원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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