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우리 농업 지킨 대가는 물대포였다

  • 입력 2016.09.30 09:58
  • 수정 2016.09.30 10:00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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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지난달 25일, 백남기 농민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에 의해 뇌진탕을 입고 난 뒤 317일 만이었다. 정권은 물대포 세례로 백 농민의 목숨을 앗아간 걸로 모자라, 이제는 ‘사망 원인’을 규명하겠다며 시신 부검을 시도 중이다.

사망 원인은 명백하다. 물대포 때문이다. 이미 지난해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 민중총궐기 직후 찍은 백 농민의 CT 촬영 사진만 봐도, 물대포로 인한 외인사(외부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한 사망)임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부검을 시도한다는 건, 또 다른 사망 요인을 찾아내 경찰들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생각할수록, 지금 정권이 보이는 행태는 가관이 절찬이라고 밖엔 볼 수 없다. 고인은 한 평생을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바쳤다. 대학생 때부터 유신독재에 반대해 싸웠고, 5.18 광주민중항쟁의 유공자로도 선정됐지만 “살아남은 자는 말이 없다”며 스스로 보상을 거부했다.

또한 그는 한 사람의 농민으로서 평생을 농민운동에 헌신했다. 특히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우리 땅에서 나는 밀이었다. 우리나라의 밀농사는 1950년대 미국으로부터의 잉여농산물 대량 원조 이후 사실상 고사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정부 수매로 근근이 이어지던 밀 농업은, 1984년 전두환 정권의 수매 중단으로 다시금 타격을 입었다. 현재 우리밀 자급률은 0.2%다.

이런 상황에서, 백남기 농민은 우리밀 종자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차도 안 다니는 시골길을 돌며 씨앗들을 모았고, 2년 간 모은 종자 24kg을 각 지역으로 보냈다. 여러 농가들을 설득해 보리 대신 밀을 심게 했다. 현재 백 농민의 고향 광주·전남 지역은 전국 우리밀 생산량의 50%를 차지한다. 절멸되다시피 한 한국 밀농사를 살리고자 한 그의 노력에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이토록 민주주의와 이 땅의 농업을 지키고자 애 쓴 한 인간에 대한 응답이 물대포요, 고인(故人)에 대한 부검(을 빙자한 시신훼손)이란 말인가. 검경은 당장 고인에 대한 부검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고인의 사망에 책임 있는 자들의 사죄가, 책임자 처벌이 절실하다. 그게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예우다.

다시금 고(故) 백남기 농민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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