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매시장 애물단지 ‘재’, 넌 누구냐

“불합리한 관행” 모두가 인정하지만 손대기 어려워

  • 입력 2016.09.11 11:28
  • 수정 2016.09.11 11:3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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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배추 한 트럭을 사면 위의 것은 멀쩡한데 아래 것은 형편없다.” 도매시장 ‘재’ 관행은 이런 단순한 불만에서 시작됐다. 농산물을 산물(혹은 산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실어와 트럭째로 경매를 하게 되면 그것이 출하자의 고의가 됐든, 운송 과정 중의 필연적 감모가 됐든 품질 미달의 물량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구매자인 중도매인들로선 언짢은 것이 당연하다.

이렇다 할 선별이 없었던 과거 산물출하 시절엔 출하자들이 ‘덤’을 올려주는 관행도 있었거니와 품질에 대한 논란이 부각되기 힘들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포장(그물망)출하가 정착되고 선별된 물량에서 계속 하자가 발생하자 중도매인들이 발끈하기 시작했다. 낙찰받은 중도매인들의 이의제기와 재조정이 매일같이 혼란을 초래했고, 결국 도매법인의 중재로 일정 비율의 정형화된 재가 등장했다.

도매시장의 ‘재’는 누구나 문제시하는 불합리한 관행이지만 배추·무의 현 거래방식 하에선 개선 논의가 쉽지 않다. 지난 5일 밤 가락시장에서 배추 경매가 이뤄지고 있다. 한승호 기자

대부분의 농산물은 이제 철저히 박스출하돼 하차경매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재를 적용하지 않는다. 배추·무·양배추 등 품목 특성상 아직까지 차상경매를 벗어나지 못하는 품목들에만 남아있는 실정인데, 이 재의 범위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배추는 출하물량의 20%를 재로 잡아 정상가의 60%만을 지급하며 양배추는 10% 물량에 50% 가격을 지급한다. 그나마 박스포장을 하는 무의 경우엔 고정비율 없이 출하자가 자율표기하는 재에 대해 50% 가격을 지급한다.

재를 둘러싼 이해 양측의 주장은 극명하게 갈린다. 출하자들은 재가 너무 과하다고 말하고, 중도매인들은 재가 없으면 도저히 장사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애초에 합리적인 접점을 찾기 어려운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재는 그 존재 자체가 대단히 불편한 관행이다. 법적·제도적 근거가 전무한데다 악습과 불신, 불만과 대립을 전제로 하고 또 그것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이 애매한 관행이 산지유통인을 거쳐 농민에게까지 손실을 안기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재를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08년 산지유통인 조직의 민원을 접수한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가락시장 재 관행 근절에 나섰지만, 중도매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간 바 있다. 시장 관계자 대부분이 재 관행의 불합리함을 인정함에도 재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일면으론 중도매인들의 피해에 분명한 실체가 있음을 증명한다.

최근 산지유통인들의 문제제기가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번엔 지역농협과 농협중앙회까지 목소리를 보태는 분위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10년을 끌고 온 재 관행이 다시 한 번 단두대에 오르려 하고 있다. 하지만 물류체계의 근본적인 개선이 없다면 2008년의 사태를 그대로 반복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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