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를 아십니까?

  • 입력 2016.09.11 09:53
  • 수정 2016.09.11 10:31
  • 기자명 박경철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박경철 기자]

산지에서 등외품을 걸러낸다 해도 포장·적재·운송 과정에서 상품가치가 하락하는 건 일상다반사다. 이를 감안해 산지출하자와 시장 중도매인 간의 입장을 고려해 오랜 세월 이어져 온 게 ‘재' 관행이다. 손해보는 장사이고 싶지 않은 관계자들의 바람이 바로 ‘재' 관행에 담겨 있다. 지난 5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랭지배추 생산지인 강원도 강릉시 안반데기의 배추밭에서 산지출하자들이 배추를 수확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해발 1,100m, 국내 최대 고랭지배추 재배지 강원도 강릉 안반데기. 산비탈을 일궈 만든 65만평의 밭에 폭염과 가뭄을 이겨낸 배추가 푸르른 생명력을 과시하며 장관을 연출한다. 그 사이사이로 배추 수확이 한창이다. 배추가 아닌 ‘금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배추값이 폭등한데다 추석 대목까지 앞두고 있어 농가들이 출하를 서두르고 있어서다.

실제로 도매가는 지난달 배추 3포기 1망(10kg) 기준 1만5,250원으로 전년 동기대비 122% 급등했고, 지난 6일 배추 1포기 평균 소매가는 8,035원으로 한 달 전보다 두 배나 뛰었다. 지난 5일 강릉 안반데기 고랭지 배추 수확 현장에서 만난 산지유통인 김씨는 “그 동안 시세가 좋지 않았는데 이런 날도 있어야 되지 않겠나”며 “올해는 폭염과 가뭄으로 고생을 너무 많이 했는데 이제야 보상을 받는 것 같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김씨는 6만평 이상의 밭에서 관리자를 두고 농사를 짓는 대규모 겸업농의 형태로 배추를 출하한다고 했다. 강원도 고랭지 배추 생산량의 80% 가까이는 김씨처럼 산지유통인 겸업농이 출하하고 있다. 물론 80%의 일부에는 농가가 40일 정도 키운 뒤 밭을 통으로 거래하는 포전거래도 포함된다. 나머지 20%는 중소농가가 농협을 통해 출하한다.

김씨는 이내 마냥 웃을 수 없는 이유를 털어놓는다. 김씨는 “농사를 잘 지어서 가락시장에 아무리 1등품을 가져가도 20%는 2등품으로 처리돼 반값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5톤 트럭에 1,000망을 싣고가면 200망이 절반값이니 100망은 공짜로 주는 셈이다. 트럭 10대면 1대, 1,000대면 100대니 어마어마한 양”이라고 하소연했다. 수확의 기쁨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건 이른바 ‘재’ 관행이다. 게다가 김씨는 가락시장 검품 과정에서 배추를 파헤쳤는데 경매를 못 받을 경우 상품가치가 하락하는 점과 경매 이후 가격재조정에 따른 손실도 문제로 지적했다.

대관령 현지에서 만난 최성권 한국농업유통법인 강원연합회 사무국장도 “한 트럭에서 180~200망을 재를 잡는데 그렇다고 품위가 안 좋은 걸 실을 수도 없다. 그럴 경우 경매 자체를 받지 않기 때문”이라며 “모조리 1등품을 보내도 다짜고짜 재 관행으로 2등품 가격으로 처리하는 건 산지유통인의 입장에선 너무도 억울한 일이고 손해도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현지 산지유통인들은 유통과정에서 배추의 품질에 문제가 생길 걸 감안하더라도 출하물 20%에 대한 경락가 60% 적용은 심각한 문제라며 재 관행의 폐지에 목소리를 모았다.

재 관행은 결국 농가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중소농가와의 포전 계약거래 규모가 크진 않지만 시장 관행이 있는 상황에서 산지유통인들이 제값을 쳐주는 건 말 그대로 손해보는 장사여서다. 이렇다보니 재 관행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도 크다. 강원도에서 만난 농협 관계자는 “재라는 불공정 관행이 십수년간 유지되며 곪을 대로 곪았다. 농협에도 손실이 크고 농민도 손해를 보다보니 이제는 없어져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