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의 농사직썰]“농정대란에 茶山 정약용을 생각한다”

  • 입력 2016.09.04 19:26
  • 수정 2017.01.02 09:25
  • 기자명 김성훈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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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중앙대 명예교수 경실련 소비자정의센터 대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조선왕조 오백년을 통틀어 우리 대한국민이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동서양에 길이 빛나는 불세출의 실학자(實學者)다. 오늘날에 이명박근혜 극우보수정권 치하에서 극심한 사회양극화와 도농이탈, 1% 대 99%의 비대칭성 등으로 무수한 고통을 받고 있는 기층 민중들의 참상과 이 땅에 농부로 태어나서 갖가지 설움과 억울함에 시달리고 있는 민초들의 절망을 바라보면서 다산 선생의 가르침에서 그 해법을 찾아보기로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수지맞는 농사, 편히 지을 수 있는 농사, 농민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정책 등 국가가 농업·농촌·농민 살리기의 3농정책을 펴야 한다고 역설했다. 농정대란을 겪고 있는 오늘날, 정부가 거듭 곱씹어야할 대목이다. 지난달 23일 조생종벼를 수확해 톤백으로 옮겨 담는 농민들의 실루엣이 힘겨워 보인다. 한승호 기자

구원(久遠)의 개혁사상

다산 선생의 사상과 저술활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개혁(改革)’이다. 그가 살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조선 봉건사회의 해체기(解體期)로서 누적된 봉건적인 병폐가 도처에 드러나 있었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의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고 바로 세우는 길은 개혁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산은 깊이 통찰한 것이다. 그 시작은 모름지기 관료와 정치지도자들의 쇄신과 정치제도 경제사회정책의 개혁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믿고, 구체적인 개혁정책 대안서인 <경세유표>의 완성에 이어 관료들의 윤리지침서인 <목민심서>를 내놓았다.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자(新我之舊邦)”의 다산 정신은 500여권의 방대한 저서 가운데 그 3분의 1이 정책관련 개혁론(改革論)이라는 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조선 왕조는 임진·정유 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 등 엄청난 규모의 국난을 겪으면서 왕조 재정과 민생의 파탄, 각종 질병의 발생 등으로 혼돈상이 극심했다. 시대적으로는 봉건왕조체제의 무능과 당쟁의 병폐가 끝이 없었고, 나라의 운이 무도한 임금아래 특정정파의 정략과 실정으로 크게 기울고 있었다. 토지 및 조세제도와 군대관련 제도 그리고 정부 양곡을 봄에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받아들이는 환곡제도 등 3정(三政)이 극도로 문란하고 지배권력층의 횡포와 병폐가 극심하여 이농 탈농 행렬이 줄을 잇고 그 원성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땅을 꺼지게 할 정도였다.

마침내 다산은 조선조 초기 개혁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처럼 “군주와 목민관 등 통치자가 백성을 제대로 사랑하고 위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존경하고 따르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통치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이는 곧 하늘의 뜻이다”라는 민본(民本)사상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무위무능하고 부패한 군주나 목민관들은 백성들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역성혁명적(易姓革命的)인 사상을 피력하였다. 본디 역성혁명론을 주창한 원조는 맹자(孟子)였다. 임금(紂王)이라 할지라도 인(仁)과 의(義)를 해쳐 임금답지 못하면 그 임금은 죽여도 좋다는 뜻의 말을 하였다. 정도전은 이같은 맹자의 영향을 깊이 받아 조선 왕조 개국 후 1394년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에서 임금의 자리를 바르게 하는 원리를 밝히고 있다. 민심을 얻으면 백성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군주를 버린다.

여기서 다산이 36세 때 곡산부사 시절의 유명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보자. 그가 부임하던 날 이계심(李啓心)이란 자가 10여 항목의 건의서를 가지고 다산 앞에 나타났다. 이계심은 전임 부사 때 그곳 백성 1,000여명을 이끌고 관가로 가서 사또의 부정을 항의하다가 쫓겨나 도망자의 신분이었다. 요즘말로 지명 수배 중이던 농민 데모대의 지도자격이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가 스스로 다산 앞에 나타난 것이다. 당장 체포하자는 주위의 권유를 물리치고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하여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은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라 했다. (박 대통령에게 쌀값 보장의 공약을 상기하려 상경 시위하다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옹 참사와 비교해 보라.)

<목민심서>에서도 “민(民)과 목(牧)은 근본적으로 평등하며 목(牧)이 그 자리를 제대로 관리하려면 봉공(奉公)과 애민(愛民)을 잘해야 한다.” 국가의 기본은 백성이며, 국가는 백성들에게 어진 정치를 펴야한다는 민본 주권론을 펴고 있다. 다산의 개혁사상은 시종여일하게 모든 국가정책에 있어 ‘사람이 먼저이고 농민 노동자 서민이 중심’이었다.

다산의 3農 사상

일찍이 다산 정약용 선생은 임금께 드리는 ‘농책(農策)에서 천하 사람들이 나랏일의 근본(本)을 버리고 끝(末)만 도모하니 기름진 논밭과 살찐 흙이 모두 묵히게 되고, 높은 모자, 좋은 옷을 입은 놀고 먹는 사람이 늘어난다. … 농사일의 고통스러움을 근심하지 않고서 어찌 왕업의 터전이 굳건하길 바랄 수 있으며, 농민의 고달픔을 어루만지지 못하면서 어찌 모든 백성의 평안함을 기대할 것인가? 차라리 대막대기를 끌며 바다를 건너 이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라고 크게 한탄했다. 말하자면 요즘의 “헬조선”론의 원조격이다.

불행하게도 다산의 예언은 적중하고 만다. 입으로만 개화를 부르짖던 구한말의 조정은 계속된 서정(庶政)과 농정(農政)의 실패에 겹쳐 외세의 강압으로 강제 개항, 개방을 당한다. 그리고 이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민생은 더욱 도탄에 빠지고 외세는 발호했다. 그 결과는 마침내 동학농민혁명과 을사보호조약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의 멸망으로 이 땅의 뭇 선남선녀들이 만주로, 하와이로 한 많은 유랑 길에 나서게 되었다. 마치 오늘날 WTO 체제하에서 이명박근혜 정권이 50여국들과 미친듯이 체결한 FTA 등으로 농촌경제가 피폐해지고 식량자급율 마저 23.6% 수준에 머물러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으로 추락했다. 설상가상 사상 최저의 농업예산 비중(3.7%), 환경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현상까지 겹쳐 바야흐로 우리 농업과 민초들의 앞날이 어찌될지 걱정이 태산 같다.

다산 선생은 그 개혁 제1항목으로 지주제도의 폐해를 혁파하는 토지개혁론(田論)을 주창한다. 그는 반계의 공전론(公田論)과 성호의 한전법(限田法)을 뛰어 넘어 ‘경자유전(耕者有田)’과 ‘협동경영’의 원칙에 입각한 여전법(閭田法)과 정전법(井田法)을 제안한다. 농민이 농민으로 존재하려면 농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확고히 하고 공동경영(협업)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하였다. 농민을 토지의 주인으로 삼는 입민지본(立民之本)은 오로지 농지의 재분배를 통해서 세울 수 있다고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주장을 펴는 등 다산의 농업관은 대단히 원칙적이면서도 근본적이다. 현재 농지와 산지의 70~80% 이상이 권력지배자들과 부재지주 도시자본에 의해 불법, 비법적으로 소유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그 시사성과 실천성이 절실하다.

원래 “농업이란 하늘(天時)과 땅(地利)과 사람(人和)이라는 3재(三才)가 어울려 농업의 道를 일군다.”라는 사상은 오늘날 현대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친환경 친자연의 농업관을 의미한다. 특히 농업은 태생적으로 자연적 제약, 기술적 제약, 사회경제적 제약, 세 가지 불리점(不利点)이 있는 바,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는 국가가 다음과 같은 농업, 농촌, 농민살리기의 3농(三農)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첫째는, 대저 농사란 장사보다 이익이 적으니, 정부가 각종정책을 베풀어 “수지맞는 농사(厚農)”가 되도록 해주어야 하며, 그 둘째는, 농업이란 원래 공업에 비하여 농사짓기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우니, 경지정리, 관개수리, 기계화를 통하여 농사를 편히 지을 수(便農)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그 셋째는, 일반적으로 농민의 지위가 선비보다 낮고 사회적으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함에 비추어 농민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上農)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농업 농민을 이처럼 우대하지 않으면 바다를 건너 막대기를 벗 삼아 떠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토로할 만큼 농업·농촌문제를 오늘날 서유럽 국가들에서 보듯 나라와 겨레 발전의 필수기본조건(national minimum requirement)으로 인식한다.

茶山은 영원히 살아 있다

마침내 1817년 불후의 명저인 <경세유표>를 끝내고, 그 이듬해 <목민심서>를 마무리 하자, 하늘은 마침내 기다렸다는 듯이 18년의 귀양살이를 푸신 것이다.

2주를 걸려 9월 13일 마현 고향집에 도착하였으나 노처와 아이들의 얼굴빛이 굶주림에 처량하다. 그런데도 귀양길을 떠날 때 기록해 두었던 재산목록과 비교하여 더 불어난 여유분 재산은 주변 친지들에게 나누어주도록 조치한다. 다산은 여생을 주로 고향집에 칩거하며 우리나라 제례(祭禮)와 사법제도의 모음 책인 ‘흠흠신서’를 완성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먼저 떠난 옛 친구와 지인들의 묘지명 지어주기, 산수유람하기 등으로 자유인이 되어 벌 나비 따라 청산을 오르고 냇물은 건너며 다음 세상을 조용히 준비하고 기다린다.

그리하여 부인 洪氏와의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일(回婚日) 아침, 즉 1836년 음력 2월 22일 진시(辰時, 아침 7~9시), 다산 선생은 마재(馬峴) 자택에서 향년 75세로 고요히 눈을 감았다. 다산이 이승을 하직하는 날 마지막 남긴 그의 회혼시(回婚詩)는 지금도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60년 세월, 눈 깜짝할 사이 날아갔으나, 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와 같구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은 늙었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유언에 따라 두 분은 지금 마재 여유당(與猶堂: 겨울 시내의 살얼음판을 건너듯 조심하고 삼간다는 뜻) 뒤 언덕의 한 무덤에 오늘도 나란히 누워 계신다. 님(偉人)은 갔어도, 님의 개혁정신과 사상은 더욱 절실히 살아있다.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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