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6.08.2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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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최용탁 소설가]

김대중 정부는 IMF의 신탁통치 속에서 출범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IMF는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를 강제하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를 옥죄어왔다. 거칠게 말해서 지구를 하나로 묶는 경제체제와 규제의 완화, 혹은 철폐를 큰 틀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강력한 힘이었다. 자유주의라든가 세계화 등 지금은 낯익은 신자유주의를 이루는 요소라 할 만한 정책은 이미 IMF 훨씬 이전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인 정책적 이념으로서 신자유주의 도입은 IMF 외환위기 직후인 국민의 정부 때 부터라는 게 정설이다. 정확하게는 김영삼 정부 말기에 시작되지만 이때는 레임덕에 시달렸을 때라 실질적으로는 김대중 정부부터라고 볼 수 있다.

전회에서 살펴보았듯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농민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운동 내부에서 김대중 정부에 참여하는 속도와 방식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적극 협력을 모색하는 지도부와 이를 개량주의로 인식한 현장의 활동가들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졌고 결국 지도부가 교체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그 결과 많은 운동 역량이 전농을 떠나거나 운동 선상에서 이탈했고 이는 농민운동의 중대한 손실이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1999년부터 새로운 지도부를 중심으로 신속하게 운동 역량을 회복하면서 김대중 정부를 선명하게 반농민 정권으로 규정하여 투쟁에 나선다.

서울 한강대교에 올라가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는 전농 회원들.

다시 치열해지는 투쟁들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7월 27일, 강원도 춘천시의 8개면 2,000여 명의 농민들이 서울 여의도공원 문화의 마당에 모였다. 춘천 농민들의 대규모 상경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농민들은 5톤 트럭을 무려 24대나 동원하여 오이, 호박, 고추, 가지 등의 농산물 1만4,000여 상자를 싣고 왔다. 농산물 가격 폭락에 항의하고 최저가격제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라는 게 농민들의 요구였다. 집회 장소에 쌓인 농산물을 앞에 두고 농민들은 “농민도 사람이다, 제값 받고 살아보자” 고 구호를 외쳤다.

그 해에 농산물 가격은 처참한 지경이었다. 오이 하나의 산지 가격이 20원이었다. 인건비와 포장비, 운송비를 포함하면 50개들이 한 박스에 최소 4,000원이 나와야 하지만 경매가는 고작 1,000원이었다. 하지만 소비자가 살 때는 가격이 오이 1개에 300원으로, 무려 15배의 가격 차이가 났다. 왜곡된 유통구조와 농정 실패의 결과였고 이에 분노한 농민들이 일어난 것이었다. 농민들은 차로에 오이와 토마토 1,700 박스를 뿌리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단일 시군 농민회가 주도한 상경 시위로는 기록적인 경우였다.

정광훈 전농 의장이 ‘초국적 자본의 마름 회의’라고 이름 지은 시애틀 WTO 각료회의에 전농의 유상욱 사무총장이 참가하여 한국 대표로 연설한 것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한국의 민중운동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었고 그 주력군 중 하나인 농민운동이 반세계화 연대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 해 11월 14일 제 1차 민중대회를 시작으로 12월 10일에는 ‘농가부채 해결 및 WTO 수입개방 반대 제 1차 전국농민대회’가 열렸다. 2차 민중대회 날이기도 했던 이날 농민들 1만5,000여 명이 상경하여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고 민중대회에 합류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주요 구호는 농가부채 해결과 노동시간 단축이었다. 서울역 광장을 출발해 명동성당까지 시위행진을 하는 도중에 곳곳에서 투석전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대학생 한 명이 실명하고 농민회원이 뇌출혈을 일으켰다. 수십 명의 시위대가 부상을 당하고 많은 연행자가 나온 이 날의 시위 후에 전농은 즉시 농성에 돌입했다. 집회에서 농민들이 준비한 물푸레나무 몽둥이와 경찰의 곤봉이 맞서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는데 그 물푸레나무를 버스에 싣고 온 것이 정선군농민회였다. 그 사실이 밝혀져 젊은 처자들이 많던 정선군농민회원 다수에게 수배가 떨어지자 그들도 함께 농성에 돌입했다.

일주일에 걸쳐 명동성당에서 진행된 농성 기간 중에 농민들은 청와대 진격투쟁을 감행하여 수십 명이 연행되었고 전국 동시 다발로 이틀 간 국회의원 사무실 점거농성을 했다. 17일부터는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를 120여 명의 농민들이 점거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당 총재와 사무총장으로부터 농가부채 경감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의원 발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것만으로 그 해 투쟁이 마무리된 게 아니었다. 정부는 농민대회와 관련하여 농민 19명에 대하여 긴급구속영장을 신청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국회 앞 농성이 다시 이어졌다. 마지막 날인 31일까지 이어진 농성 끝에 세 명이 구속되고 6명이 불구속되는 선에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모두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한다며 들떠 있던 20세기의 마지막 날까지 농민들은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갔다.

그야말로 숨 가쁜 투쟁의 연속이었다. 일 년 동안 땀 흘려 일한 농민들은 농한기를 맞아 다시 아스팔트 위에 선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은 피폐의 길로 들어서 있었다. IMF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금세라도 농촌을 집어삼키려 넘실대고 농민들은 위기를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 세계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이 될 터였다.

칠레와의 FTA 협상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FTA 시대의 개막

자유무역이란 어떤 고상한 이론을 들이대더라도 결국 생산력이 발달한 나라들 간에 펼치는 새로운 경제 식민지 쟁탈 전쟁이다. 세계 공통의 룰과 지역 간 룰, 쌍방 사이의 룰을 협상하고 만드는 행위가 총을 들지 않은 전장과도 같고 그 과정에서 힘센 국가들의 서열이 정해진다. 우리나라처럼 수출의존도가 절대적인 국가는 이 속에서 고달픈 줄타기를 해야 한다. 스스로 무역 시장을 주도해나갈 힘은 없으니까 초강대국인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여러 역할을 떠맡게 된다. 때로는 마름으로, 때로는 새끼 제국주의로, 때로는 수탈을 당하는 입장으로.

박정희 정권 이래로 조성된 소위 ‘수출입국’이라는 신화는 너무도 강고하여 그 누구도, 그러니까 민주정부들도 그 이상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민족경제, 자립경제론은 대중에게도 위정자에게도 들리지 않는 극소수의 외침이었다. 끝없는 경제의 발전이라는 환상을 깨고 가난하게 살자는 전환의 목소리 또한 이 사회에 발붙이기 어려웠다. 마침내 ‘부자되세요!’라는 날것의 욕망이 거리거리에서 들려오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미 신자유주의에 편승한 정부는 다른 나라에 뒤질세라 FTA를 추진하고 있었다. 다자간 협정인 우루과이라운드의 악몽이 가시기도 전에 쌍무협정의 파도가 밀려온 것이었다.

농민들에게 최초로 들려온 소식은 지구 반대쪽에 있는 칠레와의 협상 소식이었다.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은 1998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시작되었다. 대외무역 거점 확보, 구리와 같은 원자재의 안정적인 공급처 확보가 목적이라는 정부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 협정은 농민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칠레가 과일 수출 대국이었기 때문에 국내 과수 농업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칠레의 과일 농업은 이미 미국의 대자본이 지배하고 있었다. 정부는 칠레를 FTA의 첫 상대로 잡은 것은 다른 나라들과 FTA 체결을 위해 마치 연습상대를 삼듯이 선택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농업 분야의 피해가 큰 것으로 예측됐다. 정부가 칠레와의 FTA 체결에 따른 농업부문에 대한 피해에 대한 충분한 연구 없이 한-칠레 FTA를 추진한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정부는 그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협상을 중단하기는커녕 이해당사자를 배제한 밀실 협상을 하더니 결국에는 문제가 생기면 사후적으로 대책을 수립하겠다는 밀어붙이기식 태도로 일관했다.

사실 기나긴 살농정책으로 농업의 기반이 극히 취약한 우리나라로서는 세계 그 어느 나라와의 FTA라도 직접적으로 농업이 피해를 입게 되어 있는 구조이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은 하나의 시작이며 거대한 해일이 밀려올 물꼬가 트이는 것이었다.

칠레와의 FTA는 단순히 농민들의 경제적 피해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환경운동과 급식, 안전한 먹거리 운동 등을 펼쳐온 많은 단체들이 반대 선언을 하고 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FTA 비준은 농민의 생존권 박탈뿐 아니라, 전 지구적인 환경문제를 심화시키고, 도시와 농촌이 더불어 사는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가로막는 중대한 생태문제’라면서 FTA가 비준돼 국제적인 농산물의 자유무역거래가 행해진다면 원거리 수송과 물질의 대량 이동으로 에너지 낭비, 자원의 지역순환 체계 붕괴로 머지않아 예상치 못한 심각한 환경 문제와 생태적 재앙이 뒤따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반대 분위기가 형성되고 농민들 역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반대 투쟁에 돌입했다. 협상이 시작되고 2년여가 흐른 2000년이었다.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농민들은 FTA반대투쟁으로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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