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 입력 2016.08.20 16:01
  • 수정 2016.08.20 16:11
  • 기자명 정은정 <대한민국치킨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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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은정 <대한민국 치킨전> 저자

시간강사로 있던 학과의 이름이 조금 복잡했다. 환경, 자원, 생명 이런 이름이 들어간 학과는 예전에 ‘농대’ 소속의 학과였지만 IMF 이후 많은 농업대학들이 이름을 바꿨다. 그래서 주로 강의를 하는 학과가 어떤 곳인지 부연을 하곤 했다. 농업고등학교도 이제는 바이오나 생명, 하이테크 같은 말을 맨 앞에 붙여서 언뜻 들으면 대체 뭘 배우고 가르치는 학교인가 싶을 때가 있다. 인척 중에 농고에 진학을 한 학생은 학교 이름에 ‘과학’이란 말이 붙는 바람에, 자기를 과학고에 간 수재로 오해를 해서 자기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를 괜히 해명하곤 한다.

지난 7월, 지역에서는 ‘홍농’이라 더 잘 알려진 홍천농업고등학교의 학생들, ‘농고생’을 만났다. 농업이란 이름 붙이기가 면구스러워 곳곳이 ‘신분세탁’을 완료한 이때, 꿋꿋하게 촌스러운(농촌스러운!) ‘농업고등학교’란 이름을 잇고 있으니 꼭 가보고 싶었다. 교장실에는 트로피나 표창장 대신에 계란판이 차곡차곡 장식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특강 담당 선생님에게 계란을 챙겨주란 당부도 잊지 않았다. 교정을 오고가는 전공 교사들은 밀짚모자에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로 작업장을 오고가고, 학생들은 실습장에서 열심히 농작물을 돌보느라 분주했다. 졸기도 하고 무슨 치킨을 시켜서 먹느냐는 질문도 받아가면서 강의를 마무리 했다.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양계반 3학년 학생들에게 졸업하면 홍천 터미널 앞에서 치맥 한 번 사겠다는 약속을 했다(혹여, 이 글을 읽은 그날의 역전의 용사들은 연락을 주시라! 치맥 꼭 쏩니다!).

소원나무에 걸려있는 학생들의 소원들을 몇 개 살펴보니. ‘팻숍’을 차리고 싶다거나 공무원이나 부사관을 꿈꾸는 학생도 있었다. 또 유치원 교사를 꿈꾸거나 대학진학을 바라는 학생들도 있었다. 장래희망으로만 보자면 ‘농고생’의 꿈은 아니다. 그럼에도 일단 대학 진학하고 꿈은 유예인 일반계 고등학생들의 꿈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니 그 꿈들이 꼭 이루어지길.

홍농의 양계장에선 2,700수의 닭이 하루에 70~80판 정도의 알을 낳는다. 홍농의 양계장은 정결했다. 학생들의 배움터의 의미가 우선이기 때문에 첨단시설과 기술을 갖추고 있는데다 담당 교사와 담당 주무관의 헌신까지 더해져서다. 기실 사람에게나 방학이 있지 닭이야 사람 사정 봐주는 것은 아닌지라 농고의 교사와 학생들에겐 방학이 없다. 이 뜨거운 여름에도 양계전공 학생들은 매일 학교에 나와 2~3시간씩 닭을 돌보고 계란을 받아냈다. 그간 홍농 계란은 학부모와 인근 주민들에게 판매하고 학교의 장학금으로 요긴하게 써왔지만, 복잡한 행정과 각종 규제에 묶여 판로가 막혔었다. 그러다 최근 언론에 홍농 계란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해결 가닥이 잡혀가고 있는 모양이다. 다행이지만 언론에 떠밀려서, 혹은 담당자의 헌신으로 일시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 농업고를 비롯한 전문계고 학생들이 학교 현장에서 생산하는 구체적인 ‘실체’가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되는 방식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도록, 행정이 받쳐주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농고 졸업을 하고도 농업 분야에 진출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홍농에서 익히는 마음과 자세는 생산자의 마음일 터. 이 학생들이야말로 한국의 농업을 지탱하는 가장 귀한 씨앗이 될 테다. 제 살림을 꾸려갈 나이가 되어 슈퍼에서 계란 한 판을 사더라도 왕년에 계란 키워본 눈에는 ‘농민’의 마음도 담겨있지 않겠는가.

강의를 마치고 돌아와 ‘홍천고딩달걀(학교에서 이 브랜드를 갖다 쓰신다하면 기꺼이 양보해야지)’ 한 개 부쳐서 밥을 먹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들의 손이야말로 구체적인 실체를 만들어내는 귀한 노동의 손이지 않는가. 조카뻘의 학생들의 노동에 기대어 먹는 한 끼의 구체성 앞에서 한 없이 부끄러워서였다.

정은정

<대한민국치킨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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