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속에서 피운 투쟁들”
“시련 속에서 피운 투쟁들”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6.08.12 14: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최용탁 소설가]

어느 사회현상이나 마찬가지지만 운동 역시 정세에 따라 상승과 하강을 되풀이하고 때로는 아예 지리멸렬하게 스러져버리기도 한다. 8,90년대에 타올랐던 민족·민중운동의 동력은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었고 사회 전반적으로 보수적,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변혁에 대한 꿈을 키우던 세대가 갑자기 세계에 대한 믿음을 잃은 세대가 되어버렸다. 공동체의 꿈 대신 자기계발과 개인의 욕망이라는 낯선 세상이 펼쳐졌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절망에 빠졌고 변혁운동의 선상에서 멀어져갔다. 세상이 변했다는 말 한 마디로 변절의 길을 가는 자들이 속출했다. 문화적으로도 X세대니, 오렌지족이니 하는 저질 문화가 주류로 부상했다. 갑자기 온 사회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어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부르짖는 세계화라는 말이 온 세상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열린다는 선전에 모두가 열에 들떠 공항이 미어지고 너도나도 자동차를 마련했다.

쌀개방과 신농정 수정을 주장하는 농민들의 시위.

이러한 사회적 경향이 폭발한 기점이 90년대 중반이었다. 그리고 1995년은 UR투쟁이 국회비준과 WTO이행특별법의 제정으로 일단락되고 6.27 지자체 선거를 통해 지방자치제가 전면화된 해였다. 사실 WTO이행특별법은 농민운동이 쟁취한 커다란 승리였다. 원래 정부 여당과의 역학관계 상 농민, 사회단체와 야당의 요구를 담은 WTO이행특별법이 제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정부와 매스컴이 합세하여 농민들과 야당이 주장하는 UR재협상과 후속협상은 불가능하다며 집요하게 매도, 외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가능하게 보였던 특별법은 집권여당인 민자당 중진의원들이 지지를 표명하면서 제정되기에 이르렀고, 이 법에 따라 95년부터 정부는 UR 결과를 수정하기 위한 후속협상과 그 동안 외면해 온 각종 농업보호조치를 의무적으로 강구하게 되었다. 14개조로 되어 있는 이 법은 UR협상의 결과 잘못된 개방조건의 수정을 위한 후속협상을 할 것, UR/WTO체제에서 허용하는 각종 국내 농축산업 회생대책을 적극화할 것, 남북한 간의 거래를 민족 간 내부거래로 할 것 등 농민운동단체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법안은 시행령을 제정하지 않음으로서 사문화되고 말았다. 농민을 달래기 위한 일시적인 기만책이었던 것이다.

신농정의 본격화

농업은 급속히 침체되었다. 따라서 농민들의 노동 강도는 강화되고,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김영삼 정부의 농어촌 구조조정 정책에 경쟁적으로 참여했다. 정부는 42조 원의 투융자 사업을 4년 앞당겨 마무리했고, ‘농어촌 특별세 투융자 사업’을 새롭게 시행했다. 이 정책들은 15만 전업농과 10만 후계인력 양성 등으로 나타나면서 농가의 10%에만 집중되었다.

농민들 간의 차별은 강화되었고, 구조조정이 본격화되었다. 막대한 예산을 투여한 첨단시설은 있지만, 운영할 예산이 없어 무용지물이 되는 부실사업이 양산되었다. 일률적인 사업은 시설원예, 축산, 가공, 유통에 집중되었다. 이것은 농민들의 다양한 작목 선택을 어렵게 했고 농업 생산의 혼란은 농업 위기를 심화시켰다. 또한 쌀 수매가격이 동결되면서 농민들의 소득이 정체되었다. UR협상으로 인한 무차별적 외국농산물 수입에 대응하여 국내 농업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WTO이행특별법’은 시행령을 만들지 못했고 농축산물 수입의 급증으로 식량자급률은 날로 하락하였다.

농민운동진영은 1995년에 변화된 상황에 조응하는 활동과 투쟁을 실천할 것을 결의하면서 전국 집중투쟁보다는 군, 도 단위의 자생적이고 주체적인 실천활동을 해나갔다. 만냥고추, 청운무종자 피해보상투쟁, 사과제값받기 투쟁, 골프장반대, 쓰레기장 반대 등 지역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역투쟁을 활발히 전개해갔다. 한편 지자체 선거대응, 농사청년조직건설, 민원상담소 개설, 농업신기술 연구 등 생활운동영역의 확대를 통해 농민조직을 지역대중 중심의 일상 활동과 조화시키려 하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사업도 경제사업 활성화, 제도정치권 진출, 협동조합 참여, 지역운동영역 개척 등으로 다원화, 다양화 되었다.

지역화, 대중화를 중심에 두고 UR투쟁의 후유증을 극복해 이후 농민운동의 과제와 방향을 모색한 농민운동은 1996년에 들어서면서 의료보험 통합일원화 요구, 신농정 폐기, 농업회생대책 요구를 하면서 대정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1997년에는 소값 파동으로 9월 들어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전개되었고 대선후보들을 압박하기도 하였다.

전농이 주도한 쌀개방 반대와 농협개혁 도보 행진.

11월 18일, 대통령 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열린 농민대회에는 농민 2만5,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농축산물 가격보장과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농민대회’였다. 농민들은 이 날 결의문에서 ‘농민의 영농 의지를 꺾고 생존권을 억압하는 무분별한 수입 개방과 농민과 소비자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농축산물 가격정책을 반대한다’며 정부에 특별법 시행령 제정과 농축산물 가격보장 등 6개 항을 요구하였다. 대통령 당선이 유력했던 김대중은 추곡수매량 감소분에 대한 정부의 직접지불제 실시와 농어촌 자녀 의무교육 확대와 대학 특례입학 등을 공약하였다. 진보진영의 권영길은 농가부채 탕감과 정부정책 오류에 대한 보상, 농수산물 유통구조 개혁 등을 내세웠다.

여의도 대회는 대통령 선거와 대학입시 등이 겹쳐 언론과 국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정권교체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민주정부에 대한 기대가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고 있었고 농민운동 세력 또한 새로운 농정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 투쟁

전농은 한동안 UR투쟁의 허탈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간부 활동가들의 생존을 위한 영농규모 확대는 활동력 침체로 이어졌고, 전농은 갈수록 위축, 정체되어갔다. 전농은 1995년의 변화된 상황에 조응하여 농민 대표성과 정치적 지위를 상승·조화시켜 ‘농민을 위한 전농, 농민을 대표하는 전농’을 만들자는 결의를 했다.

이에 근거하여 사업도 경제사업 활성화, 정치권 진출, 협동조합 참여, 지역운동 영역 개척 등을 제시하여 이전에 비해 다원화·다양화를 추구했다. 투쟁도 전국 집중투쟁보다 도 단위, 시·군 단위의 자생적이고 주체적인 실천 활동에 주안점이 있었다. 다양한 농업·농민 과제에 대한 지역투쟁과 활동은 지자체 선거를 염두에 두었다. 그리하여 지역농정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를 모으고, 농민들이 지자체 선거 및 지역농정에 책임 있는 주체로 나서게 했다. 이는 지자체 선거의 참여를 통한 농업문제 해결에 대한 모색을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농은 1996년에 들어서면서 몇 년의 싸움에서도 이루지 못한 ‘의료보험 통합일원화’를 관철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건강권 실현을 위한 의료보험연대회의’를 구성하여 입법투쟁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농민 대중투쟁을 전개했다. 1997년에는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올바른 농업정책의 마련을 위해 역량을 총동원하여 대선후보를 압박하는 투쟁을 펼쳤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농민운동 진영은 신정부가 농업을 다시 살릴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농가부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실사를 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농업정책 개혁(부채 문제, 농업회의소 개설 문제, 협동조합 개혁 등)에 대해서 비판하기 보다는 타협해 나가는 전농지도부의 운동경향에 대해서 현장 농민들의 불만이 제기되었고, 1999년 2월 대의원대회를 통해서 지도부를 교체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이러한 문제는 전농 지도부의 관료화와 개량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농 자체가 농민의 대표기구가 된 이상 정권과의 관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현상이기도 했다. 정광훈 의장을 중심으로 새로 들어선 전농 지도부는 국민의 정부의 농업정책에 대한 기대를 접고 정부의 기만적인 농업정책을 규탄하는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99년 3월 들어 협동조합 개혁을 가로막는 농협중앙회에 대한 개혁투쟁을 전개하였다. 3,000여 명의 농민들이 폭우 속에서 농협중앙회 건물 앞에서 시위를 하였고 출입봉쇄와 외국농산물 보유에 분노한 농민들이 건물을 점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정부의 탄압이 있었고, 지도부의 공백을 비상대책위를 꾸려 대처해 나간 전농은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농업구조개편 전략을 폭로하면서 시민사회단체들과 연대하여 ‘한국협동조합개혁국민연대’를 결성하여 정부의 농협개혁의 허구성을 공격하였다. ‘신경분리를 전제로 한 통합법안’을 만들어 7월에는 1,500여명의 농민이 전국농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였고 역시 많은 농민이 연행되었다.

1999년 하반기부터 전농은 농민대회를 노동자대회와 결합하여 개최해 나갔다. 한번은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한번은 농민이 중심이 되어 함께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상설적인 공동투쟁체 건설의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전국민중연대’를 결성하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1980년대와 비교해 볼 때 전농 결성 이후 1990년대의 농민운동에서는 반독점 및 반독재라는 거대담론은 약화된 반면, 농민들의 실질적인 경제적 이해와 사회적 욕구들을 반영하고 충족시킬 수 있는 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져 왔다.

또한 국내농업문제가 국제적인 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국내농업을 방기하려는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농민보호 요구가 커지게 되었다. 전과는 달리 단순한 거부 및 반대가 아닌 지배권력의 방향설정과 정책운영에 대해 비판과 투쟁을 고조시켜 나갔다. 나아가 점차 의료보험 통합, 유통, 그리고 지방자치제에 관한 논의가 활성화되었으며, 농민회원들 가운데 일부가 제도정치권에 진입하는 일도 일어났다. 농민운동이 목표로 하는 내용들이 더욱 구체화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 짙게 드리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라는 괴물과의 길고도 지난한 투쟁의 시작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