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 먼 기억 하나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26

  • 입력 2008.03.16 09:03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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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라 해도 아직 날은 차다. 나무 위에서 바라보니 동네 여기저기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아 오른다. 나무 대신 화력이 좋은 폐타이어를 태워 황을 끓이느라 대여섯 군데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것이 흡사 텔레비전을 통해 본 이라크 전황 같다. 나는 나무 위에 걸터앉은 채 담배를 꺼내 물고 마을을 바라본다. 보나마나 오늘 동네 50대에서 60대 중반까지는 거나하게 취할 것이 틀림없다. 황 끓이는 날이 촌사람들 오전부터 취하는 것이 오래된 버릇이다. 드럼통을 반으로 자른 솥 하나에 서너 집이 붙을 것이고 물이 끓을 동안 소주며 막걸리 잔이 굽이굽이 돌아갈 것이다.

“야야, 니 참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란데 니 얼굴이 와 깜장 말좆이 됐노? 겨울에는 똑 도시사람 같디마는 아이고 야야, 뭐라도 좀 덮어쓰고 해라.”

덕동 할매가 장에 갔다 오다가 나를 보더니 연신 혀를 끌끌 찬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정씨들 집성촌에 사는 일가붙이라서 이 할매 정겨움은 늘 철철 넘친다. 그러고 보니 지난 설에는 몸살에게 인질로 잡혀 있느라고 세배도 못 가고 어영부영 넘어오고 말았다는 생각에 흰소리를 꺼내놓는다.

“올핸 세배도 못 했는데 마, 선 자리에서 세배 받을란기요?”

“야야, 마 됐다. 하던 일이나 어뜩 해라.”

할매는 서둘러 자리를 떠 버린다. 나는 할마시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올해 여든다섯 인지 여섯인지 생각해보지만 가늠이 되지를 않는다. 열여섯에 결혼하고 몇 해 뒤 남편은 만주로 가고 해방이 되도록 영영 소식 없자 달랑 아들 하나 데리고 친정 동네로 들어와 증손까지 업어 키운 할마시 허리는 아직도 꼿꼿하다. 나는 멀어져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등학교 시절의 한 기억을 떠올리며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날린다.

내가 처음으로 이 마을에 살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어느 만우절 날이었다. 그날 느닷없이 어른들은 모종의 담합을 했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읍내 자취방은 텅 비어 있었다. 자취집 주인 아지매가 어른들이 삼거리 중국집에 기다리고 있는 귀띔을 해주었다. 나는 내일부터 지게목발을 두들길 수밖에 없구나, 하는 암담한 심정으로 중국집을 찾아 들어가니 의외에도 ‘꼰대’들 3형제분이 고량주를 마시다가 아주 다정하게 맞아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청천벽력이었다. 작은아버지의 일방적 통고와 아버지의 답답한 침묵을 나는 거역할 수 없었지만, 속은 엄청 삐딱해져 있었다. 나는 서천 붉게 물드는 시간에 녹전으로 왔다. 그것이 처음 양자를 들어가게 된 어느 만우절 해거름이었다. 집안에는 내일부터 내가 타고 다닐 새 자전거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넷이나 되는 누이들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는 대장정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그해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생가 마을 친구들은 방학을 해도 나를 볼 수 없자 내가 사는 곳으로 쳐들어왔다. 그날 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무어라 떠들며 웃고 열심히 놀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걸쭉한 육두문자가 날아와 우리들 어린 뺨을 후려쳐 붉게 물들여 놓았다.

“하이고오, 오늘은 웬일로 이 집에 귀한 좆이 이렇게나 많노!”

덕동 할매였다. 친구들은 지금도 가끔 술자리에서 만나면 그때 일을 꺼내놓고 낄낄거리곤 한다.

“이 밭만 보면 저걸 우야꼬 싶어서 삼동네 사람들 걱정이 태산이디 그래도 때가 되이 다 되는구나. 욕본다. 그런데 니는 삼동 내 머 하다가 이래 늦었노? 만주 갔디나?”

동네 초입 큰길 가 밭이라 지나가는 사람마다 경적을 빵빵 울려대고, 차 세워서 한마디씩 던지거나 하더니 이번에는 대추골 통장이 와서 나무 밑에 앉아 시시콜콜 묻고 또 묻는다. 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온 동네가 다 걱정을 하더라는 말에 나는 속이 뜨끔했다. 숱한 억측이 난무했을 것이다. 넉 달 반이나 가방 하나 둘러메고 떠돌아다닌 일을 그들은 농사꾼 주제에 미친 짓이라고 웃을 것이다.

“어이, 사진 한방 박어주까?”

마지막 나무를 마치고 톱을 집어던지자 대추골 통장이 박수를 치며 담배를 권한다. 나는 대단한 공익적 임무를 마친 사람처럼 대추골 통장에게 치하를 받으며 벌렁 드러누웠다. 폐타이어를 태운 연기가 맑은 하늘에 거뭇거뭇 얼룩을 지우며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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