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우리들의 농민 아버지

진주시 대곡면서 하우스 농사 짓는 74세 하만표 농민의 삶
깊게 패인 주름은 살아온 삶의 무게·고단함의 흔적
“농민들 뭉쳐야 해. 혼자서는 아무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 입력 2016.07.23 01:03
  • 수정 2016.07.24 13:12
  • 기자명 정리 원재정 기자/사진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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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농민들」은 한국농정신문이 2014년 한 해 동안 매월 만든 특집호의 모음집이다. 책 표지를 장식한 몇 컷의 사진 중에 유독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주름이 가득한 촌로의 얼굴이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은 그가 살아온 삶의 무게와 고단함을, 굳게 닫힌 입은 오늘날 우리 농민들의 착잡한 심경을 말하고 있었다. 2014년 9월 진주시청 앞에서 개최된 쌀 개방 반대 집회에서 본지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된 농민. 사진 한 장을 단서로 수소문한 끝에 ‘74세’, ‘하우스 농사’를 짓는다는 것과 전화번호, 이름만 가지고 무작정 진주로 향했다. [이 사람] 첫 번째 순서로 찾은 이는 경남 진주시 대곡면에 사는 하만표 농민이다.
대담 심증식 편집국장 

진주에 도착해 주소를 물었다. 수화기 너머 경상도 억양의 어르신 말씀은 정확한 단어를 골라 듣기가 쉽지 않았다.
“도곡면이요?”
“그기 아이라. 도곡면 아니라 대곡면. 근처에 육묘장이 있고….”
겨우 받아 적었다.

나오는 대로 갈무리해 양식 마련하는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

주소지로 찾은 마을 입구에서 멀지 않은 집. 아담한 마당을 품은 지은 지 20여년 돼 보이는 작은 양옥집은 옆으로 방 한 칸과 작은 창고 그리고 헛간을 이어 붙였다. 뒤란에는 오골계 한 마리와 토종닭 서너 마리가 작은 닭장에서 먹이를 쪼고 있다.

담벼락에는 수확한지 얼마 안 된 마늘 대여섯 접이 가지런히 매달려 있고, 헛간에는 농사가 잘되어 큼직한 양파 한 소쿠리가 있다. 나오는 대로 갈무리하여 양식을 마련하는 바지런한 수확물들은 오래전 외갓집에서 본 그 모습이다.

하만표 농민은 집에 없었고 부인 김은순씨가 손님을 맞는다. 서울서 취재 왔다는 기자 일행에 당황해 하는 것도 잠시, 곧 집안으로 들인다. “어르신 어디 가셨냐?”는 물음에 엊그제 텔레비전 보는 문제로 다퉜다며 말도 안하고 있어 모르겠다고 한다. 낯선 이들에게라도 하소연 하고 싶을 만큼 노년의 일상은 단조롭다. 드라마를 보려는 아내에게 ‘뉴스나 일기예보 같은 거나 보지 쓸데없는 것 본다’고 핀잔을 했다고 한다. ‘드라마는 나쁜 것만 보여 줘서 보면 안 된다’고. 4남매가 떠나고 노부부만 남은 집은 텔레비전이나 틀어놔야 사람목소리가 채워지는데 취향이 다른 부부의 채널다툼은 이 집만의 풍경은 아닐 터.

2014년 9월 경남 진주시청 앞에서 열린 ‘쌀 전면개방 규탄 진주시민대회’에 참석한 하만표씨가 쌀 개방반대가 적힌 머리띠를 매고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부인 김은순씨는 남편이 오기 전까지 힘겹게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고생스럽게 살아오면서 아이들 교육도 변변히 시키지 못한 안타까움, 농사일의 힘겨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에도 나아지지 않는 농촌의 삶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했다.

마당으로 난 거실창 밖으로 하만표 농민이 들어선다. 왜소한 몸집에 허름한 작업복, 작고 주름진 얼굴에 커 보이는 농약방 모자를 눌러썼다.

“길을 잘 못 찾을 거 같아서 길가 육묘장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마디 던져놓는 인삿말. 서울서 오는 ‘손님’이 행여 길을 헤맬까 마중을 나간 마음씀씀이는 이렇게 투박했다.

인사를 나누고 하만표 농민의 사진이 들어간 ‘2014농민들’ 책자를 내 놓았다. 책 표지 인물이 된 거 아시냐고 묻자 알고 계시다고 한다. 작업 하다 다친 한쪽 눈 시력이 나빠 표지를 한참 더 들여다보신다. 어떻게 살아 오셨나 듣고 싶다고 얘기를 청했다.

“1943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어. 부모님도 농사를 지었는데 너무 어려워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어. 중학교 다니다가 2학년 때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그만 뒀지. 그러곤 집안일 도왔는데 몸이 약해서 농사일은 잘 못했어. 커서는 신약방을 했어.”

한약이 아닌 양약을 파는 곳을 ‘신약방’이라 했다. 면 소재지에 있던 신약방에서 새주인을 찾는데 주변에서 하씨가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가 솔깃했다. 그렇게 시작한 신약방을 10년 정도 했는데 면에 보건진료소가 생기면서 신약방 마저 접게 됐다.

“신약방에서 불법이지만 주사도 놓고 치료도 했는데 보건진료소가 생기면서 그런 걸 할 수 없었어. 보건진료소에서 진료를 하니까, 약만 팔아서는 돈이 안 되더라고.”

그렇게 신약방을 정리하면서 농사일이 시작됐다.

“그 때가 아시안 게임을 하는 해였어. 아시안 게임 때 과일이 괜찮을 거 같은 생각에 친구와 여행을 다니다 알게 된 철원에서 농사를 짓기로 했지. 거기는 땅도 넓고, 임대료도 헐하더라고.”

비무장지대는 신천지나 다름없었다. 진주는 경지라 해봐야 1,000평이 넘을까 말까 한데, 경지 크기도 크고 임차료도 싸고. 오죽하면 전라도에서 농사지으러 온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특수작목으로 선택한 것이 수박농사였다.

“농사 재미는 보셨나요?”

하씨보다 부인 답이 먼저 나온다.

“쫄딱 망했지 뭐. 4남매 다 데리고 가서 넘의 집 한 켠에 방 얻고. 진주 보다 북쪽이라 일교차는 심한데, 비가 오면 눈덩이처럼 내리 꽂혔다. 수박은 곪아버리고.”

하씨는 “우박처럼 비가 오니까 노지에서 수박 흠집도 나고 약을 쳐도 듣지도 않았다”며 가족들 고생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정미소에서 3개월간 일했다고 말을 이었다.

쌀 열다섯 가마. 석 달 일하고 나온 품값이다. 철원 정미소는 겨울에 밤낮없이 하루종일 돌아갔다. 겨울이라도 장화를 신은 발이 땀에 젖어 ‘벅적벅적’ 할 정도로 고됐다. “한밤중에 갈아 신을 양말을 가져다주기도 했다”고 부인 김씨는 옛이야기를 하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고 “하루 결석하면 3일치 일당을 제하더라”며 지긋지긋한 시절을 기억했다.

철원서 딱 한 해 농사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진주에서도 수박을 심었다. 부모한테 물려받은 땅 700여 평에 고구마, 벼농사를 짓다가 남의 땅을 빌려 하우스 농사를 시작했다.

“농사 외엔 할 게 없었다.”

제일 많이 농사지을 때가 1,500평. 오이도 하고 수박도 심고 고추, 가지도 심고. 농사 규모가 커질수록 빚도 늘었다. 지금은 4남매 다 장성해서 노부부만 잘 살면 되지만 학교 가르치랴 시집장가 보내랴 생활고는 일년 내내 찰거머리처럼 붙어다녔다.

“빚이 제일 많을 때 1억2,000만원까지 있다가 지금은 모두 갚았다.”

부인이 옆에서 거든다. “4남매를 제대로 가르치질 못했어요. 지난 시절을 생각하면 기가 막혀요.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아들 둘 딸 둘인데 셋째 딸만 자기 힘으로 대학을 나왔어요. 그 애는 대학에 간다고 일하라 나오라 해도 안 나오고 공부만 하더라고요. 농사로는 벌이가 시원찮은데, 공부를 하겠다니 집에서는 하나도 도와주지 못했어요.”

자식이 원하는 만큼 뒷바라지 못한 지난 세월은 길어지는 한숨만큼 가슴을 후빈다. 가난을 물려받은 농민에게 가난을 대물림하는 것만큼 아픈 게 또 있을까.

“농민회를 빨갱이라고 했지만
직불금 같은 거 전부 농민회가 만든 거야”

경남 진주시 대곡면의 자택 앞에서 하만표씨가 중절모를 쓰고 미소짓고 있다.

“농민회 활동도 하셨는데 어떻게 농민회 활동을 하게 되셨나요?”

“그 전에 수세로 1필지에 쌀 3, 4가마를 냈어. 수리조합에서 내라고 하니까 우리는 원래 내야 하는구나 하고 냈지. 그런데 농민회에서 조사를 해보니까 수세를 내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는 거야. 그래서 그걸로 싸웠지. 차도 흔치 않은 시절이라 소달구지에 장작이며 솥이며 싣고 갔지. 여의도서 밥도 해먹고 국도 끓이고. 보름을 농성하고 싸웠어.”

결국 수세는 반가마로 줄더니 지금은 개인 부담은 없다.

“그리고 한농이라는 회사에서 나온 피토모스 상토로 모종을 키웠는데 모종이 잘 안됐어. 상토에 문제가 있었던 거지. 그것도 농민회에서 들고 나서서 싸웠지. 그러니까 결국 한농에서 보상을 해 줬어. 이런 걸 보고서 농민들도 뭉쳐야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농민회에 87년도에 가입하고 활동했지.”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수세싸움의 성과, 기업의 보상, 농민들도 이길 수 있다는 성취감을 맛본 그 시절은 누구에게라도 자랑할 수 있는 ‘인생의 전성기’이다.

“93년부터 4년간 대곡면지회장도 했지. 그때는 추곡 수매가 인상과 WTO반대 투쟁을 주로 했어. 그 때는 농민회가 잘 될 때 였어.”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보람이나 어려운 점은 없으셨어요?”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늘 어려웠지. 어떤 사람은 농민회를 빨갱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런 게 어려움이지. 그런데 보람도 컸어. 직불금 같은 것들 전부 농민회에서 주장해서 만들어 놓은 거야. 농산물 수입개방하면서 우리 농민들 생산한 농산물 값 폭락하니까 직접보상해라, 해서 만들어 진거야. 농민회가 투쟁 안했으면 이런 거 정부에서 해 주겠어. 그래서 농민들이 뭉쳐야 해. 혼자서는 아무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니까.”

10가마 농사지어 5가마 지주 주고 나머지로 먹고 살았는데, 지금은 10가마 농사지어 1가마만 지주 주지만 이앙기, 트랙터, 콤바인…, 기계삯에 인건비에 나가는 돈이 워낙 많아 손에 쥐는 게 얼마 없다.

“십년 전 매상이나 똑같다. 농사가 도무지 타산이 맞지 않아. 쎄가 빠지게 고생만 하는 거고.”

이제 나이가 많아서 옛날처럼 농민회 활동에 적극 나서지도 못한다는 하씨는 “농민대회 하면 같이 가는 정도”라고 마음만 보탠다고 덧붙였다.

지금도 농사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하 씨는 600평 하우스 농사를 하고 있다.

“기름값, 비닐값 등 영농비가 절반이상
들어가서 남는 게 거의 없어”

하우스에는 애호박과 가지농사를 한다. 지금은 애호박 끝내고 잠깐 쉬고 9월에 가지를 다시 심는다.

“그렇게 농사지으면 1년 수입이 얼마나 되나요?”

“한 4,000만원 정도 될까? 그런데 올해는 그것도 안 될 거 같아. 아내가 아파서 병원을 다니느라 일을 거들어 주지 못해서 호박 수확을 제대로 못했어.”

게다가 영농비가 차지하는 비용이 만만찮다. “매년 비닐을 새로 씌우는데 비닐 값만 180만원 들고, 비닐 씌우는 품삯이 140만원 들어가. 그리고 하우스가 오래 되서 해마다 보수하는데 돈이 적지 않게 들어가고. 겨울에는 열풍기를 돌리는데 한해에 기름을 3차에서 4차정도 때야 해. 지금은 기름값이 많이 내려서 부담이 조금 줄었어. 그래도 기름값으로 1,000만 원 이상 들어가.”

1년 농사지어서 2,000만 원 정도 수익이지만, 소소한 비용까지 따지면 1,000만 원 조금 넘는다는 계산이다.

“앞으로 언제까지 농사지을 생각이신가요?”

“우리 논이 도로로 들어가게 됐어. 결정된 거는 오래 됐는데 이명박 때 4대강으로 돈을 너무 많이 써서 도로공사에서 돈이 없어서 공사를 못하고 있다고 하더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보상이 나올 거라고 하니까 그거 받고 농사 그만 해야지. 아이구, 이제 힘들어서 농사 계속 못 하겠어.”

농촌인구의 40% 이상이 65세를 넘었다. 이들 중 대다수가 크고 작게 농사를 지으면 살아가고 있다. 나날이 어려워져가는 농촌현실에서 삶을 지탱해온 농민들은 변변히 노후를 준비하지 못하고 늙어가고 있다. 특히 가난한 농민들 대다수는 그 굴레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사회 보장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노동력을 상실해가는 농민들의 노후는 걱정스럽기만 하다.

하만표 농민의 노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농사를 계속할 기력은 나날이 쇠잔해져가고 물려받은 땅의 보상금이 유일한 노후 대책이다. 그나마 매달 20만 원 정도 나오는 노인연금이 위안이 된다고 한다.

“지난번 선거에서 누가 자기 뽑아주면 노인연금 30만원으로 올려준다고 하던데.” 부인 김은순씨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듯 반가운 웃음을 짓는다.

토·일요일도 없고 새해 첫날에도 제사 모시고 밭으로 나갔던 농민들이 이렇게 가난한 노후를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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