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개방에 맞선 농민들”

  • 입력 2016.07.10 21:02
  • 수정 2016.07.10 21:07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농민운동을 오래 해온 이들은 한 마디로 농민운동은 수입개방 반대의 역사라고 말하곤 한다. 1992년 연말 대선을 앞두고 30여명의 대학생들이 명동성당 앞에서 대선후보들이 쌀 개방 반대에 대해 대통령직을 걸고 약속해 줄 것, 정부차원의 범국민 대책위를 구성할 것 등 3개 항의 요구사항을 걸고 삭발 단식농성을 벌였다. 그 무렵부터 농민운동의 UR반대투쟁은 광범위한 대중과 결합한다.

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전국농민회총연맹은 범국민적인 연대투쟁으로 확산시키면서 WTO-FTA체제를 확립하려는 선진국들과 민족·민중간의 날카로운 전선을 세운다. 더불어 다국적 기업과 국내 집권층을 상대로 하는 운동 진영의 싸움이었다.

1994년 3월 10일,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농민들과 사회단체 관계자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농업지키기 범국민운동본부’가 출범하였다. 전국농민단체연합회, 전국연합, 흥사단 등 194개 단체가 참가한 범국민운동본부가 이날 발표한 선언문의 요지는 “쌀과 기초농산물의 전면개방에 직면한 비상시국에 한시적으로 공동대응하는 운동체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범국민운동체가 필요하다. 범국민운동본부는 기존의 농산물수입개방저지 운동의 성과를 이어받아 앞으로 우루과이 라운드(UR)협상 국회비준과 농업대개혁에 주체적으로 대응해나가겠다”는 것이었다.

1994년 UR 반대투쟁에는 많은 대학생들이 함께 했다.

가톨릭농민회의 새 운동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가농의 활동이다. 전국농민회가 출범하면서 기독교농민회는 조직적 해소의 길을 택했지만 가톨릭농민회는 새로운 농민운동의 길을 모색한다. 많은 가농의 활동가들이 곧 농민운동의 중추였기 때문에 전농의 출범과 함께 가농 스스로는 커다란 조직력의 약화를 피할 수 없었다. 내부에서는 기농처럼 해소 과정을 밟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가농은 또 다른 농민운동의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가농의 새 운동은 ‘생명·공동체 운동’이라고 명명되었고 1990년은 새로운 전환의 해였다. 물론 새로운 운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해서 이전까지 해왔던 운동을 부정한다거나 싸움의 현장에서 물러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반농민적인 세계화와 자본권력과 싸우며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영역으로 운동이 확대 심화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전환의 첫 해에 이미 표방된 것이었다. 김승오 신부는 <한국 가톨릭농민회와 생명공동체운동>이라는 논문에서 전환의 관점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민족자립농업의 관점에서 볼 때 동서대립의 해소와 그에 따른 세계화 추세에서도 민족국가는 기본적으로 자기 민족의 생존을 위한 수단을 자급해야한다는 시각이다. 여타 산업에 더 이상 희생될 수 없는 농업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둘째, 근본적인 변혁의 관점이다. 즉 생명·공동체운동은 개인적 삶의 각성과 구체적인 생활의 변화로 시작된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운동이 구조와 체제의 문제에 집중하여 인간과 구체적인 생활, 영성의 문제를 차선으로 돌렸던 경향에 대해 반성하면서, 생명공동체운동은 현대 물질문명의 비인간화된 가치관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관으로 세계의 새 변혁을 이루는 근본적인 변혁에 우선적인 가치를 둔다는 것이다.

셋째, 생태론적인 관점이다. 이는 생명·공동체운동은 인간과 사회의 물질적 생활에도 관계하지만 전체 생태계의 보호유지와 조화를 추구하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즉 환경보전형 지속농업과 소비형태로의 전환을 위한 유기순환적인 농업의 관점을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생각은 가톨릭농민회 헌장에 잘 나타나 있다.

‘…농민은 자주의식과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대지를 지키고 생명을 가꾸는 생명의 일꾼으로서 하느님 창조사업을 완수해내는 소명을 가진 역사발전의 주인공이요, 생명의 담당자, 민족의 어머니이다. 우리 농민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중의 자유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험난하고 줄기찬 투쟁을 전개해온 자랑스런 역사를 바탕으로 참된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이룩해야 할 역사적, 민족적, 생존적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나아가 인류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생명과 평화를 해치는 일체의 요소들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모든 생명을 아끼고 모시고 살리기 위해 공동체적으로 협동하고, 생명의 특성인 다양성, 순환성, 관계성을 드높여 생명공동체 대동세상을 이룩해야 할 문명사적 대변혁운동의 사명을 갖고 있다.…’

가농이 주창한 새 운동은 농민운동 내부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엄연히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전개해나가는 농민운동의 한 뿌리임은 분명하다. 실제로 가농은 새로운 출발 이래 우리밀 살리기운동과 우리콩 살리기운동, 귀농운동, 쌀과 기초농산물 수입반대운동, 유전자조작 농산물 반대운동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전농 역시 가농이 가진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운동을 해나갔다. 1991년 4월 전농은 출범 1주년 기념행사에서 ‘농업사수 환경선언’을 선포하였는데 여기에는 농민운동 조직이 아닌 노동운동, 여성운동,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조직 등 27개 다른 영역의 부문조직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이 선언은 그때까지 도시지역의 반공해운동 차원에 머물고 있던 한국의 환경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것이었다. 이는 반대·거부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농민운동을 ‘대안을 제시하고 요구하는 운동’으로, 농촌지역의 생태·환경운동까지 지평을 넓히는 새로운 운동을 제시한 것이었으며 또한 민중운동이 시민운동과 함께 문제의 대안을 모색하는 새로운 연대운동의 차원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쌀지키기 범국민운동’과 ‘우리농업지키기 범국민운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UR 국회비준 저지투쟁

소를 몰고 상경 시위에 나선 농민들.

모든 농민과 전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3년 12월 15일 김영삼 정권의 UR협상은 일단락되었다. 이에 투쟁의 중심은 이듬해 2월 15일 최종이행계획서 제출저지와 국회비준 거부를 통한 UR재협상으로 모아졌다. 1994년은 UR국회비준을 앞두고 조직이 최대한의 역량을 모아 저지하여야 하는 비상한 시기였다. 김영삼정권은 아무런 대안도 없이 UR국회비준을 몇 차례에 걸쳐 강행처리하려고 하였고 이에 농민운동세력은 김영삼정권의 UR국회비준 음모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농민운동은 특성 상 지역에서 벌어지는 운동이다. 서울 상경투쟁은 농민들의 결집된 힘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다양한 국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그리고 주장을 널리 알리는 데에 효과적이지만 그만큼 많은 역량을 투입해야 한다. 농민이 있는 곳은 지역이며 실제로 지역에서 가열찬 투쟁이 벌어졌다. 특히 농민회가 광범위하게 조직되었고 수입개방에 의해 가장 피해가 큰 호남지역에서 농민들의 저항이 치열했다. 이번 회에서는 광주전남지역의 투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전회에서 서술했던 2월 1일의 대규모 시위에 전남에서 상경하여 참여한 농민은 4,500여 명이었다. 전남에서 100여 대의 버스가 대회장에 도착하면 주력군이 도착했다는 마음이 들곤 했다는 게 당시 싸움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소회다. 불과 두 달이 지난 4월 9일, ‘밀실협상 규탄 및 국회비준거부 재협상 쟁취 국민대회’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동시다발 집회가 벌어졌다. 서울에서 열린 대회는 주로 학생들과 시민, 야당 인사 등이 참여했다.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 때만해도 농민들이 상경 시위를 벌이면 대학생들이 대거 함께 하였다. 한총련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집회에 결합하였고 ‘농학연대’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다.

이 날 집회에서 UR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100만 명이 넘게 참여했다는 발표가 있었고 200여 명의 대규모 풍물패를 앞세운 거리행진이 진행되었다. 대학생들의 참여 열기가 뜨거워서 한밤까지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가진 대학생들 중에 100여 명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한편 같은 날 광주에서는 조선대 노천극장에서 6,000여 명이 모여 ‘시 도민 총궐기대회’를 개최하고 노동청에서 광주공원까지 4km를 행진하였다. 그 해에 전개된 광주전남의 모든 집회 명칭에는 UR 국회비준저지라는 용어가 접두사처럼 붙어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전개된 투쟁일지를 보노라면 농민운동가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숙연한 마음이 들 정도다.

6월 15, 16일에는 광주에서 전남 농민활동가 전진대회가 열렸고 이어서 20일에 서울에서 열린 비준저지 농민투쟁에 700여 명이 참여한다. 경찰과 치열한 대치 끝에 100여 명이 연행되고 즉시 민주당사에 들어가 밤샘 농성에 돌입한다. 25일에는 광주에서 차량 100여 대를 동원하여 ‘UR 국회비준저지와 신공안 탄압 분쇄를 위한 시·도민대회’를 개최한다.

바쁜 농사철이 지나자마자 다시 10월 25일에 전남의 각 군에서 동시다발 농민대회를 열고 11월 16일에는 광주에서 차량 140대를 동원하여 전남농민대표자 결의대회를 갖는다. 이어서 29일에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 차량 55대, 2,500여 명의 농민이 참가한다. 이 날 대회에서 분노한 농민들은 청와대 진입투쟁을 벌였고 많은 농민들이 연행되었다. 이어서 12월 8일에는 다시 전국 동시다발 농민대회가 열렸는데 광주전남에서는 무려 400대의 농기계를 동원하고 벼가마 4,000석을 군청 앞에 야적하는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12월 28일 군 단위로 UR보고대회와 송년회를 갖는 것으로 한 해 아스팔트 농사를 마감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피어린 투쟁을 전개한 해가 저물고 농민운동사에서 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1995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