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하얀 팥을 보셨나요?

  • 입력 2016.07.08 14:11
  • 수정 2016.07.08 15:41
  • 기자명 심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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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몇 해 전 마을 몇 곳을 돌며 토종씨앗 실태조사를 할 때 80이 다되신 할머니께서 가슴 깊이 숨겨둔 씨앗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나이 열여덟에 종가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지금껏 다른건 몰라도 하얀 팥 만큼은 해마다 심어오셨답니다. 달달이 제사며 생일이며 떡을 해야할 일이 왜 그리 많던지 지금도 떡만 보면 눈물부터 나온다네요.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한과 친정엄마의 진한 사랑의 감정이 고스란히 떠오른답니다. 빨간 팥 일일이 껍질 벗겨 제사상 떡을 해야 했던 새댁, 어쩌다 팥 껍질이 보일라 치면 정성이 부족하다 타박듣기 일쑤였습니다. 제사상 찾아올 조상들 보다 살아있는 어른들 보기에 만족할 제사상 차리는 일은 어지간히 힘든 노동 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친정엄마의 사랑이 깃든 씨앗이 바로 하얀 팥이었습니다. 힘들여 껍질 벗기지 않아도 감쪽같이 거피팥떡고물로 변신하여 정성가득한 제사상을 연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입니다.

나이 드신 할머니농부들 텃밭엔 어김없이 대를 이어져 내려온 씨앗들로 가득합니다. 채소씨앗은 어김없이 한 두 포기 꽃을 피우고 씨앗을 거두고 곡식은 가장 잘 여문 것들로 골라 다음해의 씨앗으로 남겨 두는 일, 하지 무렵 캔 감자도 다시 심어 다음해 감자씨앗으로 재배를 해왔으니까요.

언젠가부터 농부들에게 씨앗은 돈이 있으면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게 돼버렸습니다. 굳이 한 달 여를 더 키우며 꽃을 피우고 갈무리하지 않아도 된 것이지요. 게다가 어느 무렵 심어야 하는지도 화학 비료 한줌은 눈 깜빡할 새에 쑤욱 자라게 하고 병이라도 들라치면 약이라는 이름의 농약으로 해결하며 그야말로 돈이 농사짓는 세상이 돼버린 후론 누구도 할머니들에게 농사에 대해 여쭙지 않았습니다.

토종씨앗 실태조사를 하며 씨앗의 특성과 자신만의 재배노하우를 여쭤보면 아주 좋아라 하십니다. 기꺼이 자신의 지혜를 아낌없이 전수해주시지요.

절기 따라 때를 맞추고 어떤 작물들을 함께 지어야 벌레들이 덜 달라 드는지 콩의 후작은 무엇이 좋은지 등 책에서만 보아왔던 농사법을 줄줄 이야기 해주십니다.

20여년이 넘도록 농사지어온 저는 왜 몰랐을까요. 종자와 비료와 농약 등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농사를 지어온 저에게는 굳이 필요한 지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시 먹을거리 농사를 시작하며 농사짓는 농부들을 농업으로부터 소외시킨 장본인인 기업의 씨앗과 비료와 농약의 고리를 끊고 토종씨앗으로 할머니들의 전통지식을 동원하여 농사를 짓습니다.

진짜배기 초짜 농사꾼이 되었습니다. 부지런히 할머니들의 씨앗과 전통지식을 배우고 무조건 딸들에게 전수해야 하겠지요. 지금 당장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소비자들과 함께 손잡을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겠지요.

세 딸들과 농사짓는 꿈을 꾸는 여성농민.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결실을 맺게 될 날을 고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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